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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y 30. 2022

매일 한 문장 7

사과 갑질

딸과 함께 쓰는 매일 한 문장.

21일째.

아빠의 문장만 여기 옮긴다.


2022-05-27

19. 인류의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모든 이의 친구가 될 수는 없어. 


딸의 절친이 있다. 요즘 절친과 조금 소원해졌다고 한다. 절친은 초등학교 6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가 같은 중학교에 입학해서 3년만에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런데 딸은 요즘말로 ‘핵인싸’로 거듭나서 드디어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는 듯하다. 그런 모습이 절친에게는 낯선 모양이다. 절친도 절친이어서 좋지만, 친구들 사이에 계층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딸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절친은 거리감을 느낀다. 친구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려는 딸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좋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걱정스럽다. 모든 이의 친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모두가 다정해서 좋지만 추억을 오랫동안 공유하는 친구는 줄어들고 만다. 


결국은 선택하고 선택되는 것이다. 어쩌면 딸은 이 선택과정이 무섭고 싫은 것일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관계의 주변보다는 중심이 좋고, 고독해지는 것보다 시끄럽게 대화하고 웃음을 교환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 돌이켜 보니, 인간관계란 흐르는 강물 같아서 어딘가에 머물러 퇴적되거나 아니면 계속 흘러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흘러가는 쪽을 택했다. 살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을 만났건만 그러므로 친구가 별로 없다. 대신 나는 인류의 친구가 되었다. 나를 모르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여기는 마음만큼은 자랐다. 딸은 앞으로 어떨까? 

헬레나 페레즈 가르시아

2022-05-28

20. 사과갑질.


지난 금요일 밤, 딸과 나는 크게 싸웠다. 동네 창피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딸이 유도체육관에서 멱살 잡고 훈련하고 돌아오면 밤 9시 30분 무렵이다. 금요일 밤이기도 해서 육개장 사발면을 사뒀다. 딸은 샤워하고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담아 앉은뱅이 상 위에 놓고서 휴대폰을 보며 느리게 먹었다. 라면을 먹다가 노트에 뭔가를 쓰기도 하고 다시 먹기도 하고 그랬다. 국물만 남은 라면 위에 젓가락을 비스듬히 놔뒀는데 그만 그 젓가락을 건드는 바람에 국물을 쏟고 말았다. 


딸은 얼음인간이 되었고, 나는 플래시처럼 움직였다. 라면 국물은 노트를 적시고 카펫으로 떨어졌다. 나는 행주 두 개를 이용해서 상을 닦고 손이 모자라 동생을 불러내 도움을 받았다. 그 순간까지 딸은 엉덩이가 바닥에 붙은 얼음인간이었다. 그래서 고함을 쳤다. 도움을 주라고. 멍 때리지 말고 움직이라고. 그러자 딸이 일어나 엉거주춤 동참했다. 나는 딸의 태도에 엄청 짜증났다. 동생은 누나에게 핀잔을 주면서 하던 게임을 마저 하러 방에 들어갔다. 딸도 짜증났겠지. 일부러 엎은 것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반성하지 않는 딸의 태도에 더 짜증났다. 딸의 반응은 ‘사과했잖아!’였다. 사과하는 사람에게는 사과에 걸맞은 어투와 표정이 있다. 그런 게 전혀 없이 ‘사과했다’는 말만 반복하니까 엄청 화가 났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빠의 태도를 공격한다. 그래서 딸의 태도를 정색하고 지적하니 ‘사과했다’는 말을 또 반복한다. 딸의 이런 태도에 어째서 내가 더 화가 났는지 곰곰이 생각한 다음, 나는 ‘사과갑질’이라고 적었다.




2022-05-29

21. 생각, 하다.


철학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인류사에는 걸출한 천재와 스승이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한다. 플라톤이니 아리스토텔레스니, 공자니 맹자니, 데카르트니 칸트니 하는 그런 철학. 하지만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철학사’이다. 죽은 사람의 생각을 공부하는 역사공부가 되겠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인문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여러 인문학 교사들이 인문학의 핵심이 ‘질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싸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교사들이 질문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질문에 걸맞은 답변을 미리 준비해 놨고, 그걸 이야기하려고 질문을 이용하는 게 아닐까?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결국 인문학은 답을 내놓는 것이라고. 그런데 타인이 생각한 답을 내놓는다면 그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과연 인문학에 어울리는 소양일까? 


‘생각 좀 하고 살아라’고 했을 때의 생각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꺼내놔 볼까. 그러면서 <생각, 하다>라는 토픽으로 인문학 혹은 철학 강좌 프로그램을 준비해 볼까 하는 계획을 스케치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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