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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un 24. 2022

인생에 간격을 둔다

매일 한 문장 15

지난 사흘 동안 쓴 문장들. 아빠는 노력 중인데, 딸은 요즘 문장을 안 쓰는 것 같아 섭섭하다. 우리는 서로 바쁘니까, 이해는 된다.


2022-06-20

43. 인생에 간격을 둔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인생에 간격을 둔다. 우선 직업과 인생에 간격을 둔다. 직업은 직업이고, 취미는 취미이며, 행복은 행복이며, 인생은 인생이다.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무엇이든 성실히 일해야 한다. 씨앗을 뿌리는 자가 아침에 일어나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고, 추수하는 자가 아침에 일어나 밭에 나가 추수하는 것은, 예전에도 해 왔던 일인 것처럼 능숙하게 하면 될 문제 같다. 하지만 인생에 간격을 둔다. 자, 이 간격에서 무엇을 할까.


나는 생각을 한다. 취미로 생각한다. 취미로 생각한다는 게 좀 웃기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생각하면서 살잖아? 사람이니까. 무생물도 아니고. "나는 숨을 쉬는 게 내 취미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숨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숨쉬기가 취미일 수는 없지.


결국 나는 필수적이지는 않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은 공부를 하고, 필수품이 아닌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최근에 뭔가 색다른 것을 시도해 봤다. 주어를 바꿔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장,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주어 '나'를 '인류'로 바꿔 봤다. 그러면 이 문장은 "인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존재한다."라고 변화한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생각을 타고 인류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인생에 간격을 둔다.



2022-06-21

44. 보이지 않는 흰 손.


딸과 나는 최근 애덤 스미스 할아버지와 두 번 만났다. 지난 번 딸과 대화하면서 <도덕감정>이라는 단어를 딸에게 전한 적이 있다. 이 단어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생각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하면서. 애덤 스미스 할아버지가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쓴 이후로 윤리학 분야에서 '도덕감정'은 여전히 빛나는 등불이다. 그런데 딸이 사회 시간에 '보이지 않는 손'을 배운 것이다. 아빠, 보이지 않는 손이 대체 뭐야? 반갑게 답했다. 지난 번 도덕감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그 할아버지 있잖아? 애덤 스미스라는 분이야. 그분이 <국부론>이라는 책에서 시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정해지고 시장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했대.


사람들의 도덕감정에 맞는 행동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고, 사람들 마음속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이 돼서는 시장의 이것저것을 정돈해 주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 이 두 단어를 짬뽕한다면, <보이지 않는 흰 손>이 되겠는데, 그게 바로 시장이 망가지지 않게 돌봐주는 도덕감정이야.




2022-06-22

45. 악과는 싸우지 않는다.


삐약삐약 어린이는 선생님을 좇아 생각하고 행동하므로 선생님과 갈등하지 않는다. 선생님에게서 상처를 받을 수는 있어도 갈등이 성립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악하지 않느니까. 악할 리 없으니까. 그러나 그 어린이가 자라나 '심지어' 학교 교사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딸은 전속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들어 봐"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사용하면서 딸이 내게 학교 ABC 선생의 만행을 폭로했다. 나의 관심사는, 아비로서, ABC 선생에 맞서 딸이 싸웠느냐 여부다. "들어 봐." 딸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친구 XYZ가 있는데, 교사 ABC가 XYZ에게 저지른 언행이 소개되었고,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여럿 학생들 OPQ, EFG 등의 사연이 등장하시고, 딸이 XYZ를 돕고자 영웅적으로 개입하시면서, 그 영웅이 얼마나 인내하면서 ABC와 같은 공기를 마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들어 봐."



나는 맞장구를 쳤다. 완전 나쁘네, ABC 선생님! “아빠가 학교에 전화할까?"  문장은 행위에 대한 의욕이 아니라 그저 딸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관습적인 표현이다. 전화할  없지. 딸의 폭로처럼  교사는 악하네. 악한 사람 중에 교사가 있을 수도 있지. 딸에게 당부했다. 손해 보는  하지 말라고. 일반론으로 덧붙인다. 그러나 악과는 싸우지  . 악과 싸우면 악을 이기기 위해 악을 닮게 되는데, 결국 악에게 정신이 오염되는 것. 그게   피해다. 그래서 정의가 고독한 것이다.






최근 코디정이 편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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