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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un 27. 2022

피해자 옹호하기

매일 한 문장 16

또 사흘 분의 문장을 남긴다. 문장에 담긴 생각을 기록한다.


2022-06-23

46. 인내는 타인을 위한 것.


특허법원에서 변론이 있는 날. KTX 타고 대전에 내려가면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봤다.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도 마음이 평온했다. 생각이 정리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다른 게 있었다. 인내라는 단어가 마음에 있기 때문...


나는 인내하기로 한다. 인내는 타인을 위한 것.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인내한다.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타인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재판부를 위해 인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우선 듣고, 그다음 기다리기로 한다. 내 차례가 오면 말한다. 생각은 명료하게 밝히되, 판단자의 영역은 지켜보기로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평정심이 내려앉았다.


옛날에는 내 생각을 더 많이 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내 생각에서 자유를 찾았다. 타인의 생각과 타인의 자유는 멀리 비켜나 있었다.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달라진 것 같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타인에 의해 내가 규정되거나 통제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재판도 이길 것 같다. 



2022-06-24

47. 피해자 옹호하기.


아들한테 메시지가 왔다. 학교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것. 곧이어 아내한테 한숨이 왔다. '당신 아들'이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신고 전화. 사건에 두 번이나 밑줄이 그어졌다. 아들의 가방 분실 사건을 접수한 후, 나는 아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어째서 가방을 잃어버렸는지 자초지종을 정확하게 설명할 것, 가방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아빠에게 설명할 것. 그렇게 무섭게 답장을 보내기는 했지만, 어딘가 좀 이상했다. 곰곰이 이 사건을 생각하다가... 근데 아들이 무슨 잘못을 한 거지? 누군가 가방을 훔쳐갔거나 함부로 손댔다면 그건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한 것일 뿐. 어? 우리 아들은 그저 피해자잖아? 부모가 돼서 졸지에 피해자가 된 아들을 혼낼 수는 없는 법. 안아 줘야겠다. 


가방을 놨던 원래 자리에서 가방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샅샅이 가방을 찾았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가방의 행방이 묘연해서 선생님한테 그 사실을 알렸다는 것이며,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며, 그러다가 선생님한테서 가방을 찾았다는 전화가 왔다는 게 사건의 전모다.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아들은 아빠한테 혼날 줄 알았다고 한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다시 메모해 둔다. 피해자 옹호하기.




2022-06-25

48. 순수이성비판을 읽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재미있다. 하지만 대단히 난해하며 아주 복잡해서 더디게 읽는다. 책은 점점 걸레가 되가고 있다. 하지만 재미있단 말씀. 이 책은 그야말로 대박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여백마다 메모로 가득하다. 책이 증거하는 칸트 할아버지의 천재적인 사상 때문이 아니다. 제1언어에서 제2언어로 번역될 때 발생하는 균열과 지각변동을 체험하면서, 마치 지질학을 연구하는 사람처럼, 마치 고고학을 탐구하는 사람처럼, 몰입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번역가로 빙의한다. 내가 무책임한 번역가라면 사전을 보지 않고 번역한다. 내가 사명감이 있는 번역가로 빙의했다면, 일일이 사전을 본다. 중요한 명사 AAAA가 나왔다. 먼저 제1사전을 본다(독한사전, 영한사전 등). 1개 이상의 한국어 단어 집합이 나온다. 적당한 단어를 골라 번역하면 하수다. 제2사전을 본다(국어사전). 제3사전을 찾는다(한자사전). <드러난> 언어 세계를 넘나들며 단어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한자 퍼즐링을 하며 번역한다. 나는 빙의에서 벗어난다. 그다음 저자로 빙의한다. <감춰진> 언어 세계에서 저자가 전하려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빙의에서 벗어난 다음 이번에는 평범한 한국인 독자로 빙의한다. 모습을 바꿀 때마다 메모를 남기며, 번역된 언어를 자유롭게 해체하거나 복원한다. 그러니 책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미래에, <순수이성비판을 읽자>라는 책을 써보고 싶다. 이런 바람은 진심이다. 이 책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칸트 할아버지의 마음이 내게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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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디정이 편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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