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을 초월한 연결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엄마는 직장인이다>에서 ‘엄마’라는 주어에 ‘직장인’이라는 술어가 연결됐다.
인간이라면 아무렇게나 연결할 수 있다.
이제 이 연결을 검증하자.
이런 연결은 ‘엄마’라는 단어와 ‘직장인’이라는 단어가 함께 속하는 동일한 의미 집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집합은 크게는 ‘인간’일 수 있고, 좀 더 작게는 ‘역할에 따른 사람의 분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집합이 적어도 하나가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만 논리적인 연결이 가능하다.
집합을 초월한 연결은
마치 규격이 다른 커넥터에 케이블 플러그를 꽂으려는 것과 같아서 ‘논리적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있고, 그 상상력이 머릿속에서 온갖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런 연결을 했다고 가정하자. 인간의 머리는 이런 연결을 논리로 이해하지 않는다. 정신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거나 문학적인 수사로 받아들인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주어 ‘엄마’와
술어 ‘모자’가
동시에 속하는 집합은
엄마는 생명체이며 인간이며 귀한 존재다. 모자는 무생물이며 물건이며 대체로 저렴한 상품이다. 만인이 동의해 줄 만한 집합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머리는 엄마와 모자를 잇는 연결에 문제가 있음을 금방 알아챈다. 이런 연결은 대체 무엇일까?
첫째, 뇌 신경 장애가 생긴 경우이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실제로 그런 착각을 한 음악 선생의 임상 얘기가 나온다.
흔히 정신병이라고 불리는 신경장애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집합이 머릿속에서 생긴 것이다. 즉, 정신질환 때문에 엄마와 모자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사람들은 <엄마는 모자다>라는 문장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이때의 이해와 공감은 엄마와 모자의 연결이 아니다. 그/그녀가 질병을 앓고 있다는 병리학적 사실이다.
둘째, 메타포에 의해 연결이 만들어진 경우이다.
메타포는 의미가 전혀 다른 두 개의 단어를, ① 주어와 술어로 연결하여, ② 주어가 술어와 비교되게 함으로써, ③ 주어의 의미를 과장하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문학적인 기법이다. 수천 년 전부터 문학이 있는 곳에 메타포가 있었으므로 인간은 메타포가 만들어 낸 연결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허구로 받아들일 뿐이며, 그 허구에 대한 공감조차 인간의 머리는 개연성을 요구한다는 점을 유의하자. 납득할 만한 모종의 의미 집합은 떠올라야 메타포는 공감을 얻는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호수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평화’라는 집합에 ‘내 마음’과 ‘호수’가 함께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모자다>라는 문장에서는 엄마가 모자에 비교됨으로써 과장되는 의미랄 게 없어서 이런 메타포는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어떤 소설 혹은 시나리오에서 작가가 엄마와 모자를 연결해 주는 특별한 설정을 해뒀다면, 그제야 비로소 독자가 메타포 연결을 받아들인다.
논리 교훈:
서로 관련없는 두 단어를 연결할 때,
만약 공통으로 속하는 집합이 없다면
논리적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논리적인 연결은 집합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