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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22. 2018

에세이2_근사하게말하기

근사하게 말하기

해마다 말솜씨가 는다. 그 덕에 여러 가지 문제에 얽힌다. 하나같이 돈 안 되는 일이다. 척하니 달라붙어서 바쁜 시간을 빨아먹지만 요런 게 인생공부이거니 생각한다. 흔한 왕따 사건이 내게 들어왔다. 당사자는 초등학생 똑똑한 남아였다. 급우 몇 명이 거짓말을 해서 자기 아들을 따돌린다는 것이며 당장에라도 학교에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이 엄마의 고민이었다. 자식 문제에는 정답이 없어서 늘 묘책이 궁하다. 이러쿵저러쿵 고민하다가 아이 엄마에게 조언했다.  


“아이한테 ‘정의란 원래 고독한 법이란다’라고 한번 말해보세요.” 


근사하게 말하면 가끔 차원이 바뀐다. 그렇게 말하니 과연 아이 표정이 자못 밝게 바뀌었으며 아이 스스로 문제에서 벗어났고 또 친구들한테서 사과도 받았노라는 답신이 왔다.  


철학자들이야 달걀과 닭을 놓고서 골몰하겠고 언어와 사고의 선후 관계를 요모조모 정리해 놨겠지만, 이따금 나는 말이 있으므로 그 말에 맞는 생각이 난다고 믿는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십 년 간 작은 회사를 경영해 왔으면서도 마땅히 색채를 지니지 못했던 것도 혹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야 줄곧 있었지만 뜬구름은 늘 어슬렁거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쏙 드는 근사한 말을 찾아냈다. 최근의 일이다. 이름하여 “칸트주의 경영”.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직원이든 고객이든 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생각을 하자, 회사는 목적의 왕국, 마음속 양심의 불빛을 믿자, 반듯한 규칙과 정밀한 시스템보다 울긋불긋한 인간의 자율성을 신뢰하자 따위. 이렇게 근사하게 되뇌면 그것에 걸맞은 생각이 자란다. 그리고 잘 자란 생각에는 행동이라는 열매가 반드시 맺힌다. 근사하게 말하자 비로소 나만의 색채를 찾았고 경영자가 되었다. 


말은 햇빛과 같은 것이다. 그 햇빛을 따라 생각이 광합성을 한다. 어린 나무는 특히 햇빛을 먹고 자란다. 나뭇가지에 피어나는 이파리처럼 아이들은 매일 내게 질문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이 진지하게 묻는다. “아빠, 친구들이 그러는데 귀신이 없대요. 선생님한테도 물어봤는데 선생님도 귀신이 없다고 말했어. 아빠, 귀신이 정말 있을까?” 그래, 과학 지식에 따르면 귀신은 없다. 어른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어른조차 실은 귀신이 있는 것처럼 군다. 귀신이나 귀신같이 홀연히 출몰하는 주인공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소설을 좋아하고, 판타지 영화를 즐기며, 현실을 벗어난 드라마에 집착한다. 무엇보다 가지각색 종교에 심취하지 않나. 귀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야 간단하겠지. 하지만 근사하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애, 우리 인간은 두 종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단다. 자연과 초자연. 뭐라고? 그래 자연과 초자연. 자연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이야. 귀신은 눈으로 볼 수 없지. 그러니까 자연 세상에서는 귀신이 없어요. 하지만 귀신 이야기가 나오면 오들오들 너무 무섭지? 귀신은 초자연 세상에서 살고 있을 거야. 자연 세상만 아는 친구들한테는 귀신은 없는 거야. 선생님도 귀신은 없다고 말해 줄 거야. 왜냐하면 학교는 자연을 가르치고 배우러 가는 곳이거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면 그 가지는 죽어요. 이것은 자연이야. 가지를 꺾으면 가지가 아프다고 해. 이것은 초자연이지. 세상은 이처럼 자연과 초자연이 함께 있단다.” 


아이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재밌어한다. <자연과 초자연>은 근사한 구담이다. 마치 레고처럼 잘 맞으며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신비한 과학세계를 탐닉하면서도 아이의 마법 세계를 해치지 않으니까.  


어쩌면 인생이란 자기에게 알맞은 말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그것은 꿈, 목표, 이상을 향한 활기를 북돋는 말일 수도 있다. 현실, 관계, 생활은 왜 아니겠는가. 나무는 햇빛을 마시며 자란다. 아이가 말을 먹고 커간다. 나는 이미 다 커서 늙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들숨에 집착했다. 나는 이제 날숨의 맛을 안다. 근사하게 말하면 여러 가지 색채의 꽃이 핀다. 그 반대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예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필경 예쁜 사람일 것이다. 새해에는 또 어떤 알맞은 말을 내쉴까.


(월간에세이, 2015년 1월호에 연재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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