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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un 27. 2018

에세이14_돼지고기 김치볶음 떡볶이

월간에세이 375호


막내의 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꽃바구니를 준비했다. 커다랗고 흰 작약이 맨 앞에 있고 칼라가 그 뒤에서 얼굴을 감췄다. 수국과 클레마티스와 스카비오사가 푸른색을 맡고 땅두릅과 천궁과 미스트블루로 초록빛을 담았다. 마른풀로 엮은 손잡이 옆에 <아들아, 신나게 놀아보자>라는 글귀가 적힌 푯말이 세워진 작은 꽃바구니다. 올해부터는 아이들의 생일마다 꽃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밖에서 술 마시며 허튼소리를 내뱉는 대가로 쓰는 돈을 한 번만 아끼면 된다.


아들 생일을 기념한답시고 토요일 아침부터 이것저것 먹은 탓에 저녁 무렵이 돼도 가족 모두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미 생일 케이크도 잘랐다. 그래서 저녁식사로 요리 하나만 내놓기로 했다. 돼지고기 김치볶음 떡볶이. 처음 시도하는 요리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떡볶이용 떡과 찌개용 돼지고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김치를 꺼내 볼에 옮긴 다음 물로 잠깐 씻어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매운맛으로 살았다. 어린아이들이 생긴 후부터 순하게 바뀌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정설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 바뀔 마음이 없거나 그럴 계기가 없었겠지.


여느 때처럼 웍을 대운 후 올리브유를 부어 넣었다. 그다음 아직 해동이 덜 된 돼지고기를 넣었다. 습관은 무섭다. 아차 싶었다. 기름이 너무 많지 않을까? 생각을 해야 해 생각을. 고기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냉장고에서 마시다 만 술을 꺼냈다. 한 잔 담고 살짝 마시니 입술 양끝이 올라갔다. 고기 위로 술을 흩뿌리고 약불로 조절한 다음 어슷썰기로 자른 대파를 두 주먹 넣었다. 그러고 나서 웍 위에 뚜껑을 올려놓았다.


이렇게 대파를 많이 넣어보지만 그래도 기름이 걱정된다. 벌써 실패한 것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옛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속담이나 격언 같이 남을 가르치는 늙은 말에 대항하던 시절도 있었다. 뒤늦게 철들었는지 모른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나는 피곤할 정도로 많은 실패를 체험했다. 꿈꾸고 희망하는 일의 대부분은 잘 안됐다. 그럴 때마다 묘하게도 나는 전진해 있었다. 실패를 했다는 건 뭔가를 시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잘못을 깨닫고 오류를 정정할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기도 해서일까? 그래서 실패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인생이 나아졌던 것일까? 사람들이 동경하는 큰 성공을 얻지는 못했어도 말이다.


포장을 뜯어서 떡볶이용 떡을 꺼냈다. 먼저 물로 씻었다. 작은 냄비를 꺼내서 물을 넣고 불을 약하게 켰다. 떡은 여기서 어느 정도 익힌 후에 옮길 것이다. 옆에 있는 웍을 살폈다. 지금쯤이 아닐까? 김치를 넣고 고기와 어울리도록 잘 섞어줬다. 모양을 보니 뭔가 부족했다. 고추장을 넣어볼 수는 있겠는데 난 고추장 요리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괜찮을까? 미리 조사하고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면 못해 본 것은 안 하는 게 낫겠지. 그러므로 고추장은 넣지 않기로 한다. 설탕? 나는 설탕을 싫어하고 소금을 좋아한다. 문득 떡에 간이 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소금을 작은 냄비 안에 푼 다음 떡을 넣었다. 떡에 간이 들어갔을 때쯤 건져내서 웍으로 옮겼다. 이제 모두 모였다. 떡과 김치와 돼지고기가 충분히 어울릴 때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약한 불에도 부글부글하고 지글지글하다.


몇 년 동안 수염을 깎지 않은 도공이 어느 날 가마 안에서 그토록 원하던 그릇을 발견했다. 문학은 여기까지의 사연과 감탄을 다룬다. 21세기에서는 그릇을 파는 이야기가 더해져야지. 활동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감탄이 필요할 때 걱정하고 격려가 필요할 때 지적하며 도움을 원할 때 조언한다. 이런 마음과 저런 마음 사이를 물리적으로 계량하면 그 거리는 아마도 수억 광년은 되지 않을까. 얼마 전 나도 그런 우주적인 차이를 체험했는데, 그 거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돕는 게 우주의 섭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저녁이 완성됐다. 다시 한번 가족 모두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잔을 부딪쳤다. 딸은 떡을 골라 먹고 웃고, 아들은 고기를 추려 먹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월간에세이 375호. 2018녀 7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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