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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Feb 06. 2019

이소노미아, 출판을 시작하다

겁없는 시작, 그리고 좌충우돌

오랜만에 브런치를 합니다.

그동안 너무 바빴습니다.


원래 바쁜 본업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출판업까지 시작했으므로

게다가 그냥 단행본이 아니라

"인문고전 전집"입니다.

정말 바빠졌습니다.


겁없이 시작했지요.

반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책을 파는 게 생각보다 상당히 어렵더군요;;;

많은 걸 배웠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경험이었고요.


하나씩 설명해보겠습니다.

오늘 다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아마 그렇겠지요)

나중에 이어서라도 설명해보지요.


"이소노미아ISONOMIA"라는 이름의 출판사입니다.

고대 희랍어로 법 앞에 공평함

오늘날에는 무지배로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무권력주의, 지배없는 사회.

멋이야 있지만,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불가능한 꿈이지요.

그래요. 나도 불가능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대한민국까지는 아니어도

천 명 만 명 이상의 큰 사회가 아니어도

범위를 좁히면 가능하지는 않을까요?

적어도,

책 앞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책 앞에서는 누구나 공평하니까요.


도서출판 이소노미아에서 나는 "편집 일"을 맡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반년이 됐지만, 

아직 급여는 없습니다.

이번 책으로 조금 수확한 돈은

다음 책 제작에 모두 씁니다.

부족하면 사비를 보탭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쓸모없는 성과일지 모르고

또 언제까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꿈은 언제나 투자를 요구하니까요.

항상 더 큰 노력을 요청하니까요.

어쨌든 여기까지 왔습니다.

조금 더 갈 생각입니다.


출판사 사슴벌레 로고(어린이 그림입니다)

도서출판 이소노미아는 두 명이 머리와 마음을 맞대어 일하는

1인 출판사(법적으로 3인 이하가 1인 출판사로 간주된다)입니다.

북 디자이너(구희선)와 아티스트(현대미술가 이완)가 

이소노미아의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그러니까 총 네 명이 어찌 되었든 함께 노동하고 있지요.


우리는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라는 이름의 전집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 몇 년을 썼습니다.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리즈는 말하자면 인문고전 전집입니다.

문학과 철학이 서로 씨실과 날실이 되어

지혜의 천을 짜내는 그런 기획인데

민음사, 문학동네, 열린책들, 창비 등의 전집은

문학전집인데 우리는 철학이 포함됩니다.

책세상 전집과 비슷한 모습을 하지만

우리는 문학이 포함됩니다.

웅진출판사에서 펴내는 펭귄클래식 전집에는 문학도 있지만 종종 철학도 있습니다.

그것과는 어떤 차이일까요.

펭귄클래식의 철학은 문학을 거들어주는 왼손에 불과합니다.

(왼손잡이라면: 문학을 거들어주는 오른손;;;;)

본진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이소노미아 전집은 문학과 철학

양 날개를 폅니다. 홀수는 문학, 짝수는 철학.


하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이소노미아의 전집의 특색을 십 분의 일도 설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존의 책들은 권위 있는 인문고전답게 뭔가 "거룩"하지요.

저희는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인문고전에서 거룩함을 거둬내고 싶었어요.

그냥 평범하고 읽기 익숙한 책이었으면 했습니다.

이 전집 기획의 편집자로서

몇 가지 구체적인 차이점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 한국어가 다릅니다.

어째서 우리 한국어는 지식을 전하는 데 자주 실패할까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고전 책 목록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막상 인문고전, 특히 철학책을 읽으면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도무지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추천한 사람조차 인문고전을 제대로 읽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나는 외국인(가령 서양사람)이 한국인보다 머리가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모든 인종의 지성은 서로 비슷한 수준이어서 우열을 가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난해하고 복잡한 지식은 어느 인종에서건 전승되기 어렵습니다.

이해가 가능하고 또 거기에 상당한 울림이 있으니까 지식이 전승됩니다.

그런데 인류사에서 그렇게 전승된 고전을 막상 한국어로 번역해 놓으면

이상하게 의미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까닭이 원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한국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문고전에 쓰이는 한국어는 평범한 한국어와 다르지요.

그건 책에서만. 그런 종류의 번역서에서만 쓰이는 

어쩐지 난해하게 거룩한 그런 무서운 한국어입니다.

이것을 평범한 한국어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소노미아 전집은 한국어가 다릅니다.

지금껏 우리가 발행한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저마다 '번역이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한국어가 다르니까요.

평범한 한국어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타인의행복> 61쪽 중

둘째, 형태가 다릅니다.

책이 갖는 형태가 다릅니다. 

표지가 갖는 형태

내지의 문장 레이아웃이

기존의 책과 많이 다릅니다.

사람의 손가락이 닿는 아래쪽 여백이 많고

행의 왼쪽은 딱 맞게 직선으로 정렬되어 있지만 

오른쪽은 자유롭게 흘러갑니다. 

독자가 독서하는 중에 딴생각을 하다가

행을 놓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목적입니다.

책 표지에는 본질만 표시하는

미니멀리즘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책의 측면도 다르지요. 

수작업으로 측면 컬러링을 구현했으니까요.

지금껏 분홍, 보라, 초록 세 가지 계통의 팬톤코드를 사용했습니다. 

독자들이 "예쁘다"라고 말해줍니다.

교보문고 MD가 감탄하며

"이렇게 예쁜 철학 책은 처음"이라고도 말했었지요.

딱 보면 정말 예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잘 팔리는 건 아니고요.


셋째, 기부합니다.

독서와 기부를 연결하고 싶었어요.

지금껏 없던 새로운 연결이지요.

기부도 경험입니다.

기부하는 경험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독자가 책을 한 권 살 때마다 소액이 기부되는 그런 프로젝트.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제안했습니다.

책 표지에 사랑의 열매를 눌러서 표현(책 제작의 후공정: "형압"이라고 합니다)하고

책의 정가의 5%를 기부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저희 제안을 환대해 주더군요.



우리 책에 대한 반응이 매우 뜨겁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읽은 사람은 극소수이며

대한민국 국민의 거의 모두가 이소노미아의 이런 프로젝트를 모릅니다.

그래서 기부액이 아직 적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지요.

TV로 홍보할 역량은커녕

홍보역량 자체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돈은 우리 편이 아니더군요;;;)

점점 알려지겠지요.

책은 계속 나올 테니까요.


그 밖에 몇 가지 더 차이점이 있는데

결국 자랑질하는 것 같아서 생략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다음 3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WHY>, 임마누엘 칸트의 <굿윌>, 존 스튜어트 밀의 <타인의행복>


모두 훌륭한 책이지요.

그런데 기대와 현실 속에서는 

숫자 0이 하나 차이가 생기더군요.

현실은 기대보다 오른쪽에서 숫자 0이 빠져 있었습니다.

판매 부수도, 매출도 0이 하나 부족하더군요.

그러니 기부금액도 0이 하나 부족할 수밖에요.

편집자 임금도 0원이고요.

하지만 책 제작에 투자되는 비용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기대를 현실에 맞게 낮춘다면?

그것도 한 방법입니다.

다만 꿈이 작아진다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꿈은 그렇게 쉽게 쪼그라들 만한 게 아닙니다.

아직 반년밖에 안 됐고요.


제작단가와 마진, 유통구조, 서점과의 관계, 언론홍보, 서평 프로젝트 등등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직도 출판업계에 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알아가는 중입니다.

재빠르게 학습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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