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였습니다. 유럽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군주 중 한 사람이었어요. 평생 지칠 줄 모르는 의지로 남자들과 싸운 귀신같은 여왕이었지요. 그러나 남편을 한없이 사랑했고 16명이나 자녀를 낳은 다산의 제왕이기도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남편 프란츠 1세는 국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답니다. 부인께서 알아서 하시니까요.
아마도 유럽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사연 많은 여군주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여자입니다. “여자는 여자다”. 이 동어반복 문장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명제였습니다. “어디, 여자 주제에!”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것을 뒤집어버렸지요. "그래서 뭐?"
마리아 테레지아는 빛나는 가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독일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1685-1740)의 장녀였지요. 아빠는 딸에게 권좌를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꽤나 노력했어요. 하지만 독일에서는 여자가 왕위를 상속받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을 세운 옛 클로비스 1세(466-511)는 여성은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살리카법을 만들었습니다. 여성의 왕위를 부정하는 법률이었지요. 클로비스 1세가 죽자 이 법률도 잊혀졌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지요. 도서관 어디 후미진 곳에서나 겨우 생명을 유지하던 낡은 법률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권을 사랑한 남자들이 이 낡고 오래된 관습법을 되살렸습니다. 그때가 14세기였고 프랑스 왕국에서였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되살아난 살리카법은 프랑크 왕국의 후예들인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아주 강력한 남자들만의 관습을 만들어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친인 카를 6세는 장차 대를 이을 딸을 위해 이 관습법의 권위를 없애야 했습니다. 그래서 국칙을 선포했어요. 여성도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황제가 살아 있을 때야 네네 하면서 국칙을 인정하는 척했겠지요. 황제가 죽고 딸이 상속을 받으려고 하자 난리가 났습니다.
혈통이 좋아도 여자는 여자였습니다. 도처에서 반란과 도전과 의심이 일어났다. 나라의 존망을 위협받았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1712~1786)가 쳐들어와서는 슐레지엔을 빼앗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생각했습니다.
"여자잖아? 어차피 모든 대륙의 군주들이 머지않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재산을 침탈할 것이 자명하잖아? 그러므로 내가 먼저 손을 쓰는 게 당연하잖아?
대왕의 선견지명 대로 되는 것 같았습니다. 보헤미아는 반란을 일으켰고,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친척(카를 7세)이 가로챘습니다.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적당히 굴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보다 똑똑했고 무엇보다 의지가 강했어요. 여자를 차별하는 터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싸웠습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경험이 늘었고 그 경험이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힘도 얻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리드리히 2세와는 15년 동안 싸웠습니다. 전쟁 영웅이며 패배를 모르던 프리드리히 2세는 그녀와 싸우다가 거의 죽을 뻔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동맹국이던 러시아의 여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1709-1762)가 느닷없이 사망하고 표트르 3세가 집권하지만 않았다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을 물리치고 빼앗긴 땅을 되찾았을 겁니다.
새롭게 차르가 된 표트르 3세는 아주 희극적인 인물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프리드리히 2세를 우상으로 섬기던 인물로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점령한 영토를 되돌려 주면서 오히려 1만 8천 명의 병력까지 선물한 채 러시아군을 철수시켰답니다. 항복협상을 하느냐 마느냐 하던 프로이센에게 행운이 날벼락처럼 쏟아진 셈이었지요.
어쨌든 마리아 테레지아는 타협하지 않고 남자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녀가 남자였다면? 아마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였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의 왕,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여대공, 이탈리아 파르마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자여서 독일의 왕은 될 수 없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건 남편의 명예가 되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깔보았던 남자들을 모두 제압했지만, 그녀가 전장에 직접 출전한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했지요. 평생 임신 중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오빠 오빠 하면서 사모했던 남편(로트링겐 공가의 슈테판)과 연애결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정략결혼이 관례였어요) 둘 사이 금술이 매우 좋았습니다(남편은 종종 바람을 핌). 5남 11녀를 낳았지요. 자녀 중에는 프랑스왕 루이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트와네트가 있습니다. 다산은 장차 이 나라를 지탱해줄 매우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싸울 때 너희들은 결혼을 하는 거란다."
남편과 사별한 후 자기가 죽을 때까지 15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스트리아의 국가체제를 정비했습니다. 법령을 정비했으며 초등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도입했지요.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귀족에게도 과세하는 등 조세제도를 확립하는 한편 강력한 상비군을 양성했습니다. 남자들이 못한 일을 해냈지요. 풍전등화에 빠진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답니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헝가리 사람들의 충성과 신뢰를 이끌어냈지요. 헝가리 의회에서 벌인 여왕의 연설 일화가 유명합니다. 장차 대를 이을 '아들' 요제프를 안고 병력동원을 호소했는데 그 연설에 감화를 받은 헝가리 귀족들이 여왕에 충성을 맹세하며 참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왕은 집권 내내 헝가리에 특혜를 주었음은 물론이고요.
로렌 지역(알자스-로렌의 그 로렌입니다)은 지금은 프랑스 땅이지만, 과거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오랫동안 영토분쟁을 겪은 지역이지요. 그 원인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의 결혼이었습니다. 원래는 독일 영주 로트링겐가의 땅입니다. 프랑스가 이 땅을 탐냈지요.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트링겐가의 슈테판의 결혼을 인정하고 상속을 승인할 테니 로트링겐가의 영토를 요구했습니다. 사랑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지 못할까요. 세기의 결혼을 이유로 독일 영주의 땅이 프랑스의 영토가 된 것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분개했을 테고요.
조상의 영토를 잃게 된 슈테판은 눈물을 흘렸답니다. 감히 조약에 서명할 수가 없었고 여러 번 펜을 바닥에 던졌습니다. 그때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조용히 펜을 주어 남편에게 건넸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결국 서명을 했고요. 그렇지만 남편은 대가 끊긴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공국을 얻었습니다. 이게 강대국이 힘이겠지요. 그래서 피렌체는 백년이 넘도록 오스트리아의 식민지가 된 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