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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22. 2018

에세이5_기묘한실험

기묘한 실험

자연은 언제나 초자연이다. 이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세상의 이치다.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유명하고 신비로운 실험이 있다. 이중 슬릿 실험이다. 1801년 토머스 영은 빛을 실험했다. 두 개의 좁고 기다란 구멍으로 빛을 쏘아 보냈다. 반대쪽에는 스크린을 놓았다. 자, 빛은 구멍을 통과해서 어떻게 스크린에 도달할까? 어떤 이는 빛이 알갱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빛이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알갱이파 수장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뉴턴이 그랬다면 그런 것이다. 한 쌍의 슬릿을 통과한 빛알갱이 집합이 스크린에 두 줄로 표시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스크린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생겼다. 아이작 뉴턴은 틀렸다. 과학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19세기 인류가 빛을 제대로 발견했노라고 확신했다. 빛은 움직임이다. 알갱이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틀렸다. 빛은 여전히 입자라는 유명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으로 노벨상을 받은 이가 아인슈타인이다. 빛은 이제 알갱이이면서 움직임이다. 명사이자 동사이며 입자이자 파동이다. 1927년 클린턴 데이비슨과 레스터 거머는 빛 대신에 전자를 쏘아 보냈다.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의 결과는 빛의 실험과 같았다. 전자도 알갱이이자 움직임이다. 이제 모든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지닌다고 말해도 좋다.

 

전자를 하나씩 쏘아 보냈는데도 스크린에 간섭무늬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짓궂게도 이 좁고 기다란 구멍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스크린에 생긴 아름다운 무늬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전자는 파동성을 잃고 입자로 회귀했다. 미시세계의 CCTV를 치워버렸다. 그러자 전자는 움직임을 회복했고 스크린에 다시 무늬가 생겼다. 관측하면 입자가 되고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이 되는 것이다. 전자의 이 신비한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양자역학 이야기다. 


이론물리학자들은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나도 한밤중에 깨닫는 바가 있어 이 초자연적인 논쟁에 동참했다. 당시 나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흔한 오해로 고심 중이었다. 나는 당신만큼이나 오해에 취약하다. 나의 해석은 이랬다. 나는 우선 전자를 사람으로 치환했다. 모든 물질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사람 안에는 여러 가지 세계가 있다. 관측자가 생긴다. 관측자가 그 사람을 평가한다. 바로 그 시점에 인간파동함수가 붕괴된다. 사람은 움직임을 잃고 단 하나의 세계만 선택된다. 관측자가 사라지면 인간은 움직임을 회복하고 다시 여러 가지 세계로 존재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내가 한 여자를 판단했을 때 그녀는 움직임을 잃은 알갱이에 불과하다. 나의 판단에 의해 틀림없이 상실된 그녀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CCTV를 동원해서 한 남자를 측정했을 때 그는 나의 렌즈 안에서 다양성을 잃는다. 기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지와 편견이라든지 취향이나 이익 따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거꾸로 생각해 보면 만사 분명해진다. 그녀가 나를 판단할 때, 그가 나를 측정할 때, 그 순간 나는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잃으면서 여러 세계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격담에는 언제나 상실된 세계가 있다. 내가 관측자로서 나의 판단을 만약 다른 이에게 전한다면 거기에서 다시 한번 그녀의 세계가 상실된다. 


다음날 나는 회사에서 간밤에 읽고 들었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줬다. 관측자가 등장했을 때의 전자의 신비로운 반응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보이는 여러 모습을 그냥 믿고 바라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했다. 타인을 비추는 감시 카메라를 내려놓자. 목격하려는 순간 모든 것이 확정된다. 확정된 세계는 추방된 세계의 그림자다. 눈에 들어오는 타인의 무늬, 그것이 그의 세계다. 그것을 존중하자. 내면을 정탐하기보다는 겉면을 신뢰하자. 거기는 상실의 세계가 없다.


(월간에세이 2015년 10월호에 연재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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