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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22. 2018

에세이4_의무력

의무력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감정은 미움과 질투와 시샘보다는 높은 곳에 있다. 남을 동정하며 애통하는 마음도 좋아한다. 영화처럼 소설처럼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거나 다큐멘터리처럼 평화롭게 사랑한다거나, 사랑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감정의 매혹적인 이끌림을 체험할 때마다 우리 인간은 나이가 많건 적건 저마다 소녀이며 소년이다. 감정으로 만든 돛이 능히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뜨거운 햇볕 아래의 권태를 극복하기는 힘들다. 당신이 내린 닻은 덫으로 변한다. 


사랑은 두 가지 차원에서 빛을 낸다. 감정에서 발화된 사랑은 영혼을 잠식하면서 환상 속으로 사람의 몸을 이끈다. 자연의 차원이다. 하지만 젊은 불빛은 금세 늙는다. 환상은 비루해지고 다른 환상을 좇는다. 그러므로 감정에 머무는 사랑은 그것이 필경 순수하고 절실하더라도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 흔한 경험에 대한 변명으로 사람들은 정(情)이라는 낱말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나는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찾고 싶었다. 내가 찾은 결론은 이렇다. 감정이 아니라 의무, 의무력에 의한 사랑이다. 감정이라는 퇴적층 위에 의무를 쌓는다. 


의무감으로 사랑하자고? 아, 그건 아니다. 감정을 의무의 힘으로 끌어올리자는 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의무 말이다. 나를 위한 의무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의무. 저녁이든 밤이든, 내가 피곤한 몸을 핑계 대지 않고 당신과 말을 섞고 낮에 있었던 온갖 이야기를 꺼내고 아이들을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설거지를 했던 까닭은, 또 내 몸보다 당신의 몸, 내 마음보다 당신의 마음을 배려하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단순히 감정의 명령은 아니었다. 격정적인 시절은 물러났으니까. 그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남편으로서 내게 주어진 의무의 힘이었다. 연애폭력이나 가정폭력의 원인은 가해자의 의무력이 없기 때문이며 일탈과 나태함과 무관심도 실은 의무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의무력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감정에서 점화될 가능성도 물론 있겠지. 나는 그저 내 마음의 양심과 선한 의지가 사랑의 힘을 그렇게 밀어 올리는 게 아닐까 추리한다. 의무력으로 승화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감정이 식었을 때의 권태를 견딜 수 없겠지. 떠날 사랑은 떠난 사랑이다. 머물 사랑이라면 드높여야 한다. 이것이 내가 후배들에게 권하는 연애론이랄까. 


얼마 전 나흘 동안 사이판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호텔 베란다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가 불현듯 의무력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뻤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달란트 비유도 덩달아 깨달았다. 그것은 인간불평등의 문제에 관한 해답이기도 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수십 년 간 골몰해 왔다. 학창 시절에는 인간의 평등을 손쉽게 주장했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주제는 ‘차이’였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의지가 다르며 운세가 다르다. 그로 말미암아 역할, 책임, 권한, 슬픔, 보람이 사람마다 달랐다. 너와 나는 동일하다고 말하기 전에 너와 나는 다르다는 명제가 현실에 더 적합했다. 그런데 사이판에서 이 차이를 다루는 방식을 의무력에서 찾은 것이다. 


누구나 재능과 운세의 차이가 있다. 더 큰 재능이 있거나 더 좋은 운세를 지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야 할 ‘태연한’ 의무를 지닌다. 권세가 아니라 의무다.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더 많은 대가를 얻어야 할 인과가 아니라, 능력이 뛰어난 만큼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인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리더가 있고 엘리트가 생긴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의무량이 그들을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무량보다 적을 리 없다. 리더의 의무력에 의해서 그 조직의 미래가 결정된다. 리더의 활력은 자신의 의무력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비롯된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행하며 더 먼 미래를 봐야 한다. 신의 선물이자 명령이다. 엘리트가 의무를 회피하고 권한과 이익만을 좇을 때 우리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절망에 익숙해진 까닭도 어쩌면 엘리트의 빈약한 의무력에 있지 않을까. 


(월간에세이 2015년 8월호에 연재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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