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 | 이과도 즐길 수 있는 철학이야기
제가 뭔가를 하나 던지려고 합니다. 이것은 현대 인류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문을 열면 아주 환한 세상이 펼쳐진답니다. 지금껏 우리가 머물던 세상이 실은 좀 어두침침한 곳이었음을 깨닫게 만들어주지요. 아주 짧은 단어 하나입니다.
law입니다.
이건 어떻게 번역하나요? 1음절로는 "법"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2음절로도 번역하지요. 평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즐기는 사람들은 "법률"로 번역할 것 같습니다. 반면 자연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법칙"으로 번역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civil law, criminal law는 각각 민법과 형법으로 번역합니다. 이때는 "법"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민법칙', '형법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law firm는 "법률회사" 또는 "법률사무소"로 번역되겠지요. 이를 '법칙사무소'라고 번역하지는 않습니다. The law of gravity, the laws of thermodynamics는 각각 중력의 "법칙"과 열역학 "법칙"으로 번역합니다. 누구도 '중력법률', '열역학법률'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이렇듯 "law"에 대한 한국어 번역어는 {법, 법률, 법칙}이라는 번역어 집합으로 형성되어 있고, 저마다 적당히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1음절의 "법"은 사실 "법률" 대신에 사용할 수 있고, 때때로 "법칙'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법칙"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곳에 "법률"이라는 단어를 대체 사용하면 좀 우스꽝스러워집니다. 확실히 한국인은 "법률"과 "법칙"을 구별해서 사용하지요. 인간의 행동에 관해서는 "법률"로, 자연의 원리에 관해서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그렇게 "law"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관한 것이든, 자연에 관한 것이든, 어떤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면, "law"입니다. 그런데 그 원리가 무엇에 관한 것이냐, 이게 다르지요.
인간에 관한 "law"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원리를 뜻합니다. 결과적으로 "의무"를 낳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law"는 이런저런 의무규칙이 됩니다. law --> duty입니다.
반면 자연에 관한 "law"는 <자연의 운동>에 관한 원리입니다. 삼라만상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규칙(인과율)을 낳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식의 대상이 되지요. law --> knowledge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은 좀 많이 다르잖습니까? 먼저, 인간의 법률을 생각해 보지요.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아주 다양한 법률들이 있습니다. 의무가 있는 곳에는 법률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볼까요?
(1) 학교에서는 다양한 법률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앉아있어야 하거나,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법률이 있었지요.
(2) 회사에도 다양한 법률이 있습니다. 근무규칙이나 근로규정이라고 합니다.
(3) 사회생활을 온전히 잘하려면 여러 가지 행동의 제약이 따르지요. 모임만 해도 회칙을 정하고 회원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규정하는데 그게 일종의 법률이지요.
(4) 한때 종교는 가장 강력한 법률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이 있는 곳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무서운 의무가 있습니다.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는 원리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곳에서는 종교가 곧 법입니다.
(5) 오늘날 문명국가에서는 종교가 국가에 권력을 넘겼지요. 가장 강력한 법률은 국가가 정한 법률입니다. "실정법"이라고 하지요. 최초의 법전으로, 고대 수메르의 통치자가 정한 함무바리 법전은 기원전 176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사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권력자가 정한 법률 때문에 죽었나요?)
오늘날 국가의 법률체계는 헌법-법률-시행령-시행규칙으로 이루어진 법령 체계가 정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각종 행정규칙과 지방정부가 정한 조례들이 아주 촘촘하게 정해져서는, 물샐틈없는 "법치주의"를 완성했다는 기분이 듭니다. 국가 쪽에서 바라보면 그런 기분이 들겠지만, 개인(국민)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기 행동을 규제하는 엄청난 양의 의무의 숲에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아는 인간 "law"의 대강입니다.
그런데 권력자(국가)가 정해놓은 법률(실정법)이라면 당연히 지켜져야 하나요? 종교의 법률은 어떻습니까? 학교와 회사와 사회 곳곳에 있는 법률이 서로 충돌한다면 이를 어떻게 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수많은 법률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진정한 법률이란 무엇입니까? 등등, 생각해 볼 게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 인류사에서 아주 많은 현인들이
이 문제를 고심해 왔답니다.
그 수많은 법률 중에서 우선순위가 중요해지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법률이건 자연의 법칙이건, 모두 "law"란 관점에서 이를 통일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스토아 학파가 대표적이었습니다. 계몽주의에서는 스토아 학파를 계승한 임마누엘 칸트가 별처럼 빛나는 인물이지요.
그들의 생각을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이렇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다함께 이 세계에 속하는데, 자연의 법칙(law)처럼 인간에게도 법칙(law)이 있지 않겠냐는 발상이었습니다.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보편적인 법률(universal law)에 의해 통치되며, 자연의 법칙이 보편적인 것처럼, 인간의 법칙도 보편적이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자연스럽게 "자연법"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자연법칙처럼, 어느 곳에서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해야 하는 법률입니다. 생명과 인권이 그러하겠지요.
이제 칸트의 생각을 들어보지요.
인간사회에서 이러쿵저러쿵 만들어지고 가공된 수많은 규범 중에서, 칸트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universal) 법칙(law)이 무엇보다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법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일컬어 "도덕법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도덕법칙이 국가의 실정법보다 우위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덕이다", "저것이야말로 도덕이다"라고 주장하는 '힘있는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말았지요. 법에 관한 칸트의 놀라운 업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늬들이 말하는 도덕은 도덕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함부로 도덕 운운하며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law 같지 않은 law 가지고 뭘 그렇게 싸우고 죽이니. 그건 너네들 취향이자나.
무엇이 도덕이냐를 두고 싸우더라도, 사실 싸우는 당사자들은 저마다 자기 경험, 취향, 성향,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도덕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대체로 보편적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칸트는 아주 대범하고 독창적이며 놀라운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도덕법에서 ‘내용’을 추방해버렸습니다.
‘형식’만 남겨두었습니다. (추방되지 않은 유일한 내용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칸트의 최고 도덕법률(law)은 이런 문장으로 표현되지요. 자연법칙(law)과 같은 형식 규범입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universal) 법률을 따르는 그런 가치관(준칙)으로 행동하는 거.
“자기의 가치관”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는 없다면, 즉, 보편적이지 못하다면, 그 가치관은 편의적인 법률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최고의 법률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까 (1)~(5)에서 예를 들었던 행동을 제약하는 다양한 법률, 학교, 회사, 사회, 종교, 국가의 규범 중에는 마치 자연법칙처럼 어디에서도 지켜야만 하는 법률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퇴사하고 어떤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무교를 택하며 이민을 가면, 금세 효력을 잃는 규정이라면 진정한 법률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물론 이런 형식주의적인 생각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다. 편의적인 법률도 중요하다고 말이지요)
칸트는 계몽주의를 완성한 철학자이자 현대철학의 큰 입구로 지금도 그 지혜가 전승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잠깐, 어째서 칸트가 그렇게 칭송받는 것일까를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서양의 오래된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칸트는 자연법칙과 인간 행동의 법칙을 모두 "law"의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풀어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인의 언어습관에서는 "law"를 인간의 행동에 관해서는 "법률", 자연의 원리에 관해서는 "법칙"으로 분리하고, 또 그런 부작용으로 "세계를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데 다소 미진한 경향이 있지만, 서양인들은 "세계를 통일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써 왔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자유의 법칙을 연결하려고 애쓴 철학자였고요.
그래서 유럽에서는 (지금이야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의 성과들을 누구보다 더 신속하게 이해하고 공부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현대에 이르러 과학은 세부 학문으로 분화되어 왔습니다만, 뉴턴의 법칙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 세계를 통일적으로 해석하려는 방향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19세기 인류는 이제 자연의 법칙은 모두 발견했던 것처럼 생각했다고 합니다. 뉴턴의 역학법칙에 더해 전자기학의 여러 법칙이 발견되었습니다. 열역학의 법칙도 19세기였지요.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끝이었는 줄 알았는데 정작 시작이었던 겁니다. 20세기에 두 가지 큰 원리가 새롭게 나왔지요.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를 아직 통일시키지는 못한 것 같더군요.
양자역학은 백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논쟁중입니다. 여전히 최신학문이며, 그렇게도 난해한 원리는 대중적이기까지 해서 영화에도 곧잘 등장합니다. 양자역학에 얽힌 여러 이야기의 맥락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law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답니다. 현재까지 양자역학은 완전한 이론이기보다는 논쟁중인 해석론이거든요. 아직은 law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해석론이 등장하는데, 이 해석론 또한 굉장하고 기묘하지만 파워풀합니다. 중력의 법칙은 상대성원리로 이어졌습니다. 열역학의 법칙은 양자역학으로 이어졌지요. 우리 인류는 양자역학에서 universal law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고, 그래서 "이 우주를 통일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것입니다. 궁극적인 자연법칙(the law of nature)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랄까요.
빛의 속도가 거론되어야 할 만큼 큰 거시세계에서 자연은 상대성원리에 따릅니다. 아원자 이하의 미시세계에서는 양자역학이 적용됩니다. 그사이의 세계에서는 뉴턴의 법칙도 여전히 적용되기도 하고요. 이들 원리는 모두 "law"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의 법률, 모두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law"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도 아직 모릅니다만, 분명한 것은 "law"라는 단어의 속성에 맞게, "언제나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그런 유니버설한 원리겠지요. 오늘날 한국에서는 많은 이가 사법개혁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법을 바꾸고 새롭게 제정하는 것과 관련되겠지요. 그 법률이 무엇이든,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을 정도의 유니버설한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법률도 진정한 법칙도 아니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저는 "그래, 그건 맞는 얘기지."라고 혼잣말로 되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법칙(법률)만은 아니어도 무엇이 더 인간적이며 좋은 방법인가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토론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