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호 |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는 약 570만 명이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포로였습니다. 그중 33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기아와 질병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요. 소련군 포로 사망률은 57%에 이릅니다. 독일군에 잡힌 미군 포로는 13만 명이었고, 영국군 포로가 20만 명이었습니다. 이들 영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3.5~5.1%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통계와 숫자의 심한 격차를 통해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의 전황과 참상 그리고 나치 독일의 태도를 느낄 수 있지요. 2차 세계대전의 주된 전장은 서부전선이 아니라 동부전선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주력은 소련에서 싸웠고, 소련은 그 넓은 모든 영토에서 사람을 징발하여 독일군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증오했겠지요. 나치는 유태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슬라브 족을 경멸했고, 소련은 동일한 경멸을 되돌려줬습니다.
소련군에게 잡힌 독일군 포로도 300만 명에 이릅니다. 이 수효 또한 엄청납니다. 그 가운데 3분의 1이 죽었습니다. 그 밖에 루마니아군 등 독일 동맹국 군인 포로도 200만 명에 이르며 비슷한 비율로 사망했습니다. 소련과 독일은 서로에게 가혹했습니다. 나치독일이 먼저 잔인함을 보여줬고 소련군은 철저하게 보복했습니다. 한편, 소련군에 잡힌 일본 관동군의 수는 53만~85만 명으로 추산되며 포로 사망률은 10% 수준이었습니다.
앞에서 잠시 통계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독일군은 영미군 포로에게 상대적으로 참혹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훨씬" 관대했습니다. 미군에게 잡힌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0.1%에 불과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국군에게 잡힌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입니다. 그 비율이 다음과 같이 전해집니다.
0.03%
그러므로 유럽에서의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5년 5월, 상당수의 독일군들은 앞다투어 미군과 영국군이 있는 서부전선에서 항복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아래 사진은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다섯 명의 독일군 포로라고 하는 데 여유로운 포즈와 표정이 믿기지 않지요. 당시 미국 전역에 700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40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답니다. 대부분 독일군이었고, 이탈리아군과 일본군도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 포로들은 농사를 하고 스포츠를 하며 미국 대학에서 제공한 프로그램으로 공부도 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우리 인류는 언제부터, 어째서, 전쟁포로에 인도적인 대우를 하기 시작했을까요? 모든 지역에서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을 했고 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노력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 인류는 참으로 잔인했었으니까요.
인류의 옛 조상들은 적군의 포로를 살육하거나 노예로 삼았습니다. 전쟁포로를 살려주라고요? 천만에요. 우리 인류는 그리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적군의 병사뿐만 아니라, 적군의 민간인을 군인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습니다.
살육은 몽골군의 상징이었지요. 당시 몽골군이 얼마나 잔혹했던지, 세계 인구의 5%가 줄어들었답니다. 대체로 동양에서는 전쟁포로의 인격과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패배자는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일본이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나라 전쟁포로를 참수하는 상황을 그린 그림입니다. 전쟁포로를 참수한 사람들이나 이걸 또 멋지게 그려서 역사에 남긴 사람이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주의를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인도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인도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을 통치하는 곳이 불과 백 년 전의 동양의 풍경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전쟁포로에 대한 처우는 서양에서 갑자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서양 사람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착했을' 리는 없지요. 백년전쟁 시기 아쟁쿠르(Battle of Agincourt: 1415)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프랑스군 포로 전원을 학살했습니다. 중세의 기독교는 지금의 이슬람 원리주의보다 잔인했습니다. 십자군의 악명은 중동지역에서나 유럽 내에서나 유명하지요. 알비 십자군(1209-1229)의 악명은 기독교 역사가 얼마나 인도주의와 달랐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랬던 서양세계가, 1864년 8월 22일, 달라집니다. 이 날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탁월하고 기념비적인 혁명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스위스 연방, 바덴공국,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프랑스, 헤세공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로이센, 뷔르템베르크 12개 국가를 대표하는 특사들이 모여 인류최초의 인도주의 국제법을 만들었습니다. "육전 부상자의 상태 개선을 위한 제네바협약"입니다. 지금은 거의 전세계 국가가 참여한 조약으로 만국법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전쟁 중임에도’ 부상자들의 생명을 인도주의적으로 돌봐주는 의무를 규정한 이 국제조약에는, - 당시 최초 제네바협약 제6조-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지요.
부상자나 환자인 전투요원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고
수용해서 치료하여야 한다.
그다음 이런 규정이 이어지지요.
부상당한 적군의 전투요원이
치유된 다음이라도
더이상 군복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된다면
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여야 한다.
그 밖의 다른 자도 교전 기간 동안에
재무장하지 않음을 조건으로
마찬가지로 본국으로 송환될 수
있을 것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고 치료하며, 치료한 적군의 부상자를 돌려보내주기까지 한다면, 포로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처우 개선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907년 전쟁포로에 대한 처우를 규정하는 헤이그협약도 체결되고, 이어서 1929년 제네바협약, 현행 1949년 제네바협약 제3협약으로 발전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국제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포로를 함부로 살상하면 전쟁범죄로 처벌됩니다.
물론, 전쟁을 수행하는 당사국이 국제법을 항상 지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고 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더 죽었겠지요. 누구든지 귀하지 않은 생명이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는 약 40만 명의 전쟁포로가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온 추축국 장병들은 수용소 생활을 통해 비로소 평화를 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전쟁포로는 영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했습니다. 긍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수용소 내에서 교회와 고향을 추억하는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돈을 벌었으며, 지역 사람들과 친구처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국제인도주의 정신이 영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못했다면 이런 일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정신이 중요합니다.
어째서 이런 정신이 서양세계에서 갑자기 생겼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요. 저는 그 까닭이 "계몽주의적인 관용”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머나, 우리 인류가 관용을 깨달은 거예요! 종교와 신분이 우리 눈을 오랫동안 칭칭 감았던 그 무지의 붕대를 "계몽주의 관용"이 풀어서 그 붕대로 타인의 상처에 감아주게 된 것인데, 이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면 하룻밤이 지나가므로 그만 할래요.
물론 전쟁이 없는 세상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