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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Dec 15. 2019

타불라 라사

28호 | 이과도 즐길 수 있는 철학이야기

타불라 라사Tabula Rasa


'타불라라사'는 아직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은 깨끗한 상태의 판자를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영어로는 'clean slate'를 뜻합니다. 라틴어 'tabula'는 영어로는 'tablet'입니다. 아이패드나 갤럭시탭 같은 태블릿 PC의 그 '태블릿'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영국 경험주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지요. 경험주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는 지식은 없으며,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조입니다. 그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타불라라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에는, 그 인간의 정신은 마치 백지상태와 같아서, 그 빈 공간을 경험을 통해 채워나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 중에서 큰 이정표를 세운 사람이 바로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입니다. 역사적인 문헌을 살펴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갑니다만, 그래도 이 단어로 인류사에 실질적으로 양향을 미친 사람은 존 로크 할아버지입니다. 존 로크가 이 단어를 직접 논문(인간지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에서 사용했던 건 아닙니다. 존 로크는 '백지White paper'라는 단어를 썼지요. 그래도 그게 그거니까, 사람들은 그냥 '타불라 라사' 하면 곧 존 로크, 이렇게 요약했던 거지요.  


존 로크 할아버지는, 인간이라면 태어나자마자 당연히 지니고 있는 관념(생득관념)이 있다고 주장하는 프랑스의 데카르트 할아버지를 비판했습니다. "이봐요. 인간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 인간의 정신은 본래 백지와 같아요. 생득관념이라는 것은 없다고요. 아기가 응애 하고 태어날 때에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요. 오직 경험을 통해서 백지에 여러 가지 생각이 적히는 것입니다."


타불라라사는 곧 경험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이 경험주의 사조를 다소 낮게 보거나 오해하더군요.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니까 멋져 보이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경험주의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영미의 경험주의가 대륙의 철학(합리주의)보다 더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타불라라사는 "모든 사람은 백지상태의 출발점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므로 당시 신분사회에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귀족의 백지나 평민의 백지나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평등개념은 인권사상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영국의 경험주의는 유럽 계몽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요.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근대혁명이 일어난 것은 이런 경험주의 철학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또한 타불라라사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백지를 채워나가는 것은 결국 자기의 자유의지일 테니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과 공공복지와 사회체제의 진보를 이뤄내는 정신적인 동력이었습니다. 더 좋은 내용으로 백지를 채워나가려면 더 좋은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나쁜 환경에 의해 개인의 정신이 오염되고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공복지를 확충하고 민주주의를 정립하도록 추동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대체로 자유를 수호하는 진보파의 사상적 밑천이 되었던 겁니다.


타불라라사로 상징화되는 경험주의 사상에서는 더 나은 경험과 더 좋은 지식으로 자기 '태블릿'을 채워 넣기 위해서 열린 마음으로 항상 타인의 경험을 경청하고 또 공부하고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본디 경험주의 사상은 반지성주의와는 어울리기 어렵지요.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속 태블릿은 얼마나 풍요로운가요?


한편, 인류의 온갖 경험지식을 한데로 모을 수는 없을까요? 그러면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타불라라사를 완벽하게 채워놓은 인류 최종 '타뷸라'. 과학자들은 그걸 인공지능이라고 부르겠지요. 그런 최종 '타뷸라' 앞에서 경험론은 무력해질까요?


그러나 '타불라라사'로 얘기되는 경험주의 사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답니다. 인간은 완벽한 백지이며 모든 것이 경험으로 나온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자는 사실 없거든요. 경험주의 세계관에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강조하는 "도덕감정론"이 펼쳐져 있습니다. 과연 인공지능에게 그런 도덕감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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