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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an 02. 2020

가차차와 르완다 커피

30호 |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의 새해와 그 새해에 걸맞은 희망을 응원합니다. 오늘 특별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30호에서는 작은 지식을 '다큐멘터리'처럼 꾸며봤어요. 여러분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지구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그런 다큐멘터리 내용입니다^^


가차차와 르완다 커피


아프리카 얘기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지만 누구나 모르는 그런 이야기일 거예요. 우리는 아프리카를 잘 모르니까요. 아프리카에는 "천 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르완다(Rwanda)입니다. 수도는 키갈리(Kigali)입니다.


어밴저스 인피니티 워가 벌어졌던 '와칸다'가 대략 여기가 아닐까, 이곳에 '블랙팬서'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자바리 부족의 '음바쿠'가 살지 않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아니면 말고 추측성 기사'를 생각해 보는 것인데, 어째서일까요?


답은 일단 미뤄두고, 르완다가 어디에 있는지 볼까요?

아프리카 중부에 있군요. 아래 그림을 보면 적도 조금 아래 쪽에 위치합니다. 서쪽에 있는 물경 100배나 큰 나라가 콩고민주공화국(구 '자이르'이며, 르완다가 이 큰 나라보다 무력이 더 세답니다)입니다. 남쪽으로는 브룬디, 동쪽으로는 탄자니아, 북쪽으로는 우간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의 넓이입니다.


르완다는 1인당 GDP가 800 달러 정도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입니다. 아프리카 국가에서 그 흔하다는 자연광물도 별로 없습니다. 산이 많아서 천 개의 언덕의 나라(the land of a thousand hills)로 불립니다. 노동인구의 90%는 농업에 종사합니다. 간단한 농기구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소규모 농업이어서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인구밀도는 높아서 음식품을 수입해야 합니다. 수출은 커피에 많이 의존합니다. 과거에는 수력발전에 의존해도 괜찮았으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화력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으며 집집마다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애쓰고 있습니다만, 아직 전기는 부족합니다.


이렇게 보면 보잘것없는 가난한 나라 같지요?


르완다는 2019년 10월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프리카 최초의 스마트폰 제조 국가입니다. 2015년 무렵 모바일 가입자는 72.6%입니다. 100명당 12.8명은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몇 년 전 통계이므로 지금은 더 많이 보급되었을 겁니다. 광섬유가 르완나 각지를 횡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안전한 수돗물을 먹습니다.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입니다. 국가 차원으로 보편적 건강보장 시스템을 적용하며 아프리카에서 최고 수준의 헬스케어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여행국가이기도 합니다. 여성장관이 내각의 60%를 넘고 2007년 사형제도가 폐지된 진보적인 국가이지요. 심지어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하는 환경정책을 펼치고 있는 나라입니다.


다시 보면 또 상당히 괜찮은 나라잖아요?
출처: https://www.nytimes.com/2019/11/23/travel/rebrandng-croatia-colombia.html


그러나 불과 25년 전에는 지구에서 가장 지옥과 가까이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 대단한 UN도, 온갖 선진국가도 이 나라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을 외면했답니다. 우리 인류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참혹한 일이 발생했지요. 이 나라에서 생긴 절망과 슬픔보다 더 큰 절망과 슬픔이 과연 있었을까요? 그러나 르완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지옥에서 벗어났습니다. 먼저 르완다의 슬픈역사를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1994년 제노사이드


르완다에는 예부터 후투(Hutu)족과 투치(Tutsi)족과 트와(Twa)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트와는 그 수효가 매우 적었고, 투치족도 20%가 되지 않았으며, 80% 이상은 후투족이었습니다. 후투와 투치는 서로 이웃하며 살았습니다. 그다지 다른 점이 없는 편의적인 구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외모도 구별하기 어렵고 언어도 같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제가 공부한 결과,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 정도의 차이보다 못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투치족은 대체로 가축을 이용해서 유목생활을 했고, 후투족은 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도시에서는 섞여 살았고요. 대구 사람과 광주 사람이 결혼하는 것처럼 후투족과 투치족도 서로 결혼하고 그렇게 평범하게 생활했습니다. 이웃집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아마도, 후투, 후투, 후투, 투치, 후투, 후투, 투치, 후투, 투치, 투치, 후투, 후투, 후투, 후투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서로 이웃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지요.


1884년 르완다는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가 됩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의 식민통치권은 벨기에로 넘어갑니다. 이때 식민통치의 주요 권력은 투치족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서양 총독부의 정책이었지요. 농민보다 더 활발한 유목민에서 인재를 등용했고 그게 식민통치에 유리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1962년 르완다는 벨기에로부터 독립합니다. 당시 아프리카 전역이 독립시즌이었지요. 여러 나라가 새로 탄생했습니다. 권력은 그 권력을 지탱해줄 이데올리기가 필요합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3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각기 다른 내전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회주의, 종교, 종족. 르완다는 '종족'을 택했지요. "후투 파워HUTU POWER"입니다.


권력을 잡은 후투족은 투치족을 산발적으로 탄압하거나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을 느낀 상당수의 투치족은 이웃나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우간다 반군에 들어가 우간다 혁명을 도운 폴 카가메(Paul Kagame) 라는 투치족 출신의 혁명가가 있었습니다. 폴 카가메는 우간다에서 르완다 애국 전선(Rwanda Patriotic Front: RPF)을 이끌면서 후투족 르완다 정부와 게릴라전으로 내전을 벌였습니다.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호시탐탐 투치족을 절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UN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르완다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대중을 선동하고 봉기해서 투치족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후투 파워 라디오는 하루 종일 학살을 선동하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프로파간다는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투치 바퀴벌레들을 죽여라!


그때가 1994년 4월 7일입니다. 갑자기 이웃집 남자들이 들이닥쳐 투치족 남녀노소를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집에 쳐들아가 아이들 앞에서 아빠를 죽이고, 환자가 의사를 죽이고, 교사가 학생을 죽이고, 신부가 교인을 죽였습니다. 평소 투치족과 사이가 좋은 후투족이라면 그들도 함께 죽였습니다. 누구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1994년 5월 16일자 타임지 표지에는, "지옥에는 악마가 모두 자리를 비웠어요. 악마들이 전부 르완다에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장식됩니다.


폴 카가메 장군이 이끄는 투치족 RPF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노사이드를 끝낸 그해 7월 15일까지 100일 동안 약 80만 명의 투치족과 트와족과 온건 후투족이 살해되었습니다. 수십 만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1994년 제노사이드>라고 합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많은 생명들이 학살당하고 있는데, UN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인도적으로 UN이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UN은 제노사이드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UN 평화유지군의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철군을 명령했습니다.  절규하며 제발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을 내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영화 <호텔르완다>를 보세요. 공포와 감동이 있는 영화입니다. 어벤저스의 워머신이 주연입니다)


제2의 소말리아가 될까 봐 걱정하던 미국은 르완다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가 개입했습니다. 아뿔싸, 프랑스는 학살자들의 편이었습니다. 학살자들이 혁명군에 잡히지 않고 이웃나라 자이르(훗날 콩고민주공화국)로 무사히 도망가도록 보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UN의 구호물자는 르완다를 외면하고 도망간 후투족 캠프로 보내졌습니다. 특수관계에 있던 이웃나라 우간다와 브룬디를 제외하면 모든 아프리카 국가도 외면했습니다. 이곳은 버려진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은 르완다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나라로 분류했겠지요.


거긴 지옥문이 열렸잖아.
이 나라는 더 이상 안 돼!
그냥 포기하자!

폴 카가메Paul Kagame


르완다 애국전선 사령관 폴 카가메. 1994년 제노사이드를 종결시킨 사람입니다. 당시 37살이었습니다. 우간다로 떠난 르완다 투치족 난민의 아들, 우간다 혁명의 공헌자, 미군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돌아온 지략가. 르완다를 침공하여 수도 키갈리를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카가메는 르완다 내전을 막고자 미국 외교관 프루던스 부시넬(Prudence Bushnel)에게서 휴전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카가메가 답했지요.


죄송합니다만 마담, 집단학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군대를 주둔시켜야 합니다. 싸우지 말라고 제게 요청하시는 건가요? 휴전은 단지 학살이 더 쉽게 자행되도록 도울 뿐입니다! (1994년 폴 카가메)


폴 카가메는 아주 미스테리한 인물이지요. 아프리카의 여느 독재자와는 생각도 스타일도 행동도 완전 다릅니다.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 점에서 독재자입니다(1994년부터 2000년까지 부통령, 2000년부터 지금까지 장기집권 대통령). 원칙론자이며 냉정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지요. 지지율이 매우 높고 경쟁자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패한 정치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절망에 빠진 르완다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결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짧게 살펴봅니다.


카카메는 우간다 국민저항군의 리더인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y)를 도와 우간다 혁명을 성공시킵니다. 우간다 혁명정부의 엘리트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칸자스에서 군사훈련도 받습니다. 전우인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설립자이며 사령관인 프레드 릭예마(Fred Rwigyema 1957-1990)가 전투중 사망하자 우간다로 귀국한 다음 RPF를 지휘합니다. 친구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Fred Rwigyema


폴 카가메는 RPF의 사령관이 됩니다. 그리고 친구가 벌인 르완다 내전을 게릴라전으로 지속합니다. 그런 와중에 르완다에서 1994년 제노사이드가 발생했습니다. RPF는 집단학살을 멈추게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본토 침공을 개시합니다. 마침내 정부를 전복해서 제노사이드를 끝냅니다. 여기까지는 유능한 아프리카 혁명 영웅의 얘기입니다. 그다음부터가 중요합니다.


200만 명에 이르는 후투족이 이웃나라 자이르 지역으로 탈주합니다.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난민 캠프가 생깁니다. 함께 도망간 제노사이드 주범들이 이 난민캠프를 장악했습니다. 자이르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o Seko)가 후투족의 뒤를 봐줍니다. 폴 카가메는 르완다보다 훨씬 큰 나라인 자이르를 침공하기로 결심합니다. 동맹국 우간다도 함께합니다. 1차 콩고 전쟁이 발발합니다. 자이르 혁명군을 도와 자이르 정부를 전복시키고 콩고민주공화국을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그후 2차 콩고 전쟁까지 치러집니다). 폴 카가메는 난민 캠프에 머물던 후투족 난민들을 르완다로 귀국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후투족 반군을 완전히 궤멸시키지는 못했지만 난민 캠프를 기반으로 재도약하려는 후투족 제노사이드 주범들을 무력화시킵니다. 여기까지가 후투족 학살자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르완다 국내 정책은 어땠을까요?

폴 카가메는 학살자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금지시킵니다. 인종, 종족, 종교에 대한 모든 차별을 없애는 한편 신분증에서 종족표기를 철폐합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민증에 출신종족을 표기했다는 건가??) 후투족과 함께 정부기관을 운영하면서, 공식적으로 국민통합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파괴된 국가 인프라를 재건합니다. 교육과 보건 인프라를 먼저 재건합니다.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었으므로 국가행정에 여성을 우대합니다. 사형제도도 폐지합니다.


학살자들을 후원한 프랑스에는 ‘빅엿’을 먹입니다. 100년 넘게 사용하던 프랑스어를 추방시키고 영어를 우대하는 한편, (영국과는 인연이 없으면서) 영연방에 가입해버립니다. 연평균 8% 이상의 경제 성장을 통해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는 이상향에 르완다 경제를 더 가까이 근접시킵니다. 카가메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젊고, 교육수준도 가장 좋은 나라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카가메의 경쟁자이자 적수라면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지요. 그가 이룩한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상대할 방법이 없어요. (카가메의 적수는 카가메의 운명을 자기들이 어떻게 해볼 수 없고 그저 자연에 맡겨야 할 것 같더군요. 어쩔 수 없어요)


몇몇 한국 사람들이 폴 카가메를 르완다의 박정희라거나 카가메가 박정희를 존경한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더군요. 해프닝에 불과한 이야기 같아요. 카가메는 투치족 마이너리티 출신이지만 박정희는 마이너리티 출신은 아니지요. 저쪽은 인종문제가 심각했으나 이쪽은 인종문제가 없었고요. 박정희는 쿠데타로 멀쩡한 민간정부를 전복해서 집권했지만 카가메는 전쟁을 통해 제노사이드를 종식시킨 후 정부를 정상화시킨 인물입니다. 카가메는 극도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통합을 위해 권력을 사용했지만  박정희는 사회를 분열시키면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카가메와 박정희는 많이 다릅니다. 오히려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카가메의 경우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어서 이것이 항상 문제로 지적돼 왔지요. 국제사회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르완다 집단학살을 일으키는 데 언론의 프로파간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공포와 억제가 작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아주 어려운 골칫거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국민통합을 한다고 해도 학살자를 무죄로 풀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재판을 해야지요. 그런데 체포된 학살 관련자가 13만 명에 이릅니다. 여기서 문제. 상당수의 재판관/검사/변호사도 1994년 제노사이드에서 학살됐습니다. 재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판사와 변호사가 30명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사법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는 것이지요. 수감자들을 모두 재판하려면 100년, 아니 200년 넘게 걸릴 것 같습니다. 수감 시설은 4만~5만 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어서 그 많은 인원을 제대로 수용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전염병 위험이 커져만 갔습니다. 수용하고 재판하고 관리하려다가 국가 인프라만 소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는 나라가 너무 가난했습니다.


혁명 후 6-7년이 지나 카가메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서양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의 전통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가차차 재판(Gacaca Court)입니다. 이 놀라운 아프리카 방식의 재판이 오늘의 주제이지요.



가차차, 풀밭에서 재판

가차차 재판에서 제노사이드 가담자가 서서 자기의 범죄를 속죄하는 모습


가차차(Gacaca)는 '풀밭에서 재판'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옛적에 있던 르완다의 지역사회에서 어떤 분란이 생기면 마을 어른들이 풀밭에 모여 이야기하고 들으면서 마을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분란을 해결하는 르완다 전통이 있었는데,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 재판을 가차차 재판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첫 재판은 2005년 3월에 시작됐습니다. 1994년 제노사이드가 발발한지 10년이 지난 때였지요. 어째서 이렇게 늦어졌을까요?


제노사이드 재판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ICTR입니다. UN이 탄자니아에 마련한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였지요. 아주 제대로된 재판입니다. 문제는 이 재판소가 관할하는 사건은 리더급의 전범만을 다루며, 너무 느리다는 거였지요. 1994년 12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93명만 기소되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13만 명은 어떻게 하지요? 다음으로 정식 르완다재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법조인이 죽은 나머지 사건에 참여할 판사와 변호사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제노사이드 수감자들은 재판도 못 받고 10년 이상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차차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풀밭에서 하는 재판이라고 아무렇게나 한 것은 아닙니다. 꽤 준비를 많이 했어요. 정부는 몇몇 마을에서 2002년에 파일럿을 운영해 봅니다. 이게 가능할까 싶었겠지요. 결과가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인 규모로 9103개의 가차차 셀(Gacaca cell)과 1545개의 가차차 섹터(Gacaca Sector)를 조직했습니다.

검사와 변호사는 없습니다. 전문지식을 갖춘 판사도 없습니다. 아프리카 전통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마을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 중에서 9인이 배심원이 됩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고, 누구나 말할 수 있으며, 심지어 피고를 위해 증언해 되는 그런 형식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목표가 정해졌습니다. 여러 가지 규칙과 가이드라인도 정해졌겠지요.


(1)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밝힐 것

(2) 제노사이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재판을 할 것

(3) 처벌할 일은 처벌할 것

(4) 화해와 통합으로 이끌 것

(5) 지역사회의 역량을 믿고 이용할 것


가차차 재판이 벌어지기까지 제노사이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돼서 생존자들은 자기 가족들이 언제 어떻게 죽었으며, 누가 죽였고, 어디에 버려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번이 매우 중요했던 것인데, 이것은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5년에서 2007년까지 1차 가차차 재판을, 2008년~2010년 2차 가차차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제노사이드 범죄는 4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습니다.

(1) 카테고리 1: 제노사이드를 기획하고 조직한 자

(2) 카테고리 2: 살인자와 폭행자 (범죄의 중함을 기준으로 여러 세부 등급이 있습니다)

(3) 카테고리 3: 재산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


원래 카테고리 1은 ICTR과 르완다 법원의 전속관할이었습니다. 카테고리 2와 카테고리 3만 가차차 재판에서 다뤘지요. 그라다가 2차 가차차 재판에서는 카테고리 1도 다뤘습니다. 가차차 재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자백하고 속죄(confession)하면 감형한다는 점입니다. 형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백에 따라 형량이 달라집니다.


출처: https://bit.ly/2MJD0V8


재판 결과를 조사해 보니 통계가 조금씩 다르더군요. 그중 하나를 가져와 봤습니다. 무려 200만 건에 육박하는 케이스를 처리했으며, 무죄도 적지 않았습니다. 형량은 카테고리 2에 해당하는 케이스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지면 11-15년의 형량이 제일 많았습니다. 가차차 재판이 1994년 제노사이드 이후 11~15년 사이에 행해졌고, 1994년부터 수감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가차차 재판의 판결이 곧 형을 끝내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출처: shorturl.at/mqvFS


가차차 재판의 기능은 '법원'을 대신해서 처벌을 선고하는 데 있다기 보다는, '국가'를 대신하여 마을공동체가 사건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화해와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공방을 통해 증거로 확증하는 '사법적 진실'과는 좀 다릅니다.

'화해'를 위한 진실입니다.


진실을 둘러싸고 말하는 행위와 듣는 행위를 통해 감정을 순화시켜주는 것 같더군요. 그것이 화해로 이끕니다. 가차차 재판의 긍정적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가디언 지 기사를 하나 소개합니다. 시간만 많으면 한글로 번역하겠는데.... 죄송합니다. 번역은 포기합니다. 요즘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번역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4/apr/03/rwanda-genocide-20-years-on


물론 가차차 재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요. 변호사를 통해 피고의 재판받을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했다는 점이며, 자백이 강요되었거나 형벌을 면하기 위해 부정한 거래가 있었거나 등등의 인권문제입니다. 예상할 수 있는 한계이지요. 하지만 제노사이드에 의해 사법인프라가 붕괴돼서 서구식 재판은 불가능했으며, 당시 르완다에서는 정의보다는 평화가 더 중요한 목표였고, 진실을 화해와 결부해서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더 급했습니다. 어쩌면, 눈앞에서 가족이 살해된 생존자에게 학살자의 인권을 강조하는 것은 르완다 사람이 아닌 멀리서 관망하는 제3자의 시각인 것 같습니다. 비판자들도 가차차 재판의 놀라운 결실을 인정하더군요.


https://bit.ly/36h7Ko6



평화클럽Peace clubs


이쯤 되면 르완다라는 나라가 사랑스럽지 않나요? 가차차 재판도 매혹적인데, 평화클럽도 예술적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로 어느 정도 진지함으로 행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르완다에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조사해 보면, 국가 차원으로, 전국민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Peace Beyond Justice.


이와 관련하여 아주 감동적인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https://bit.ly/39vdU6g

마을에서 평화클럽을 운영하는 어느 르완다 학교 교사의 문장이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가 한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아이의 부모도 또한 변화할 거예요(When we can change a child, their parents will also change)."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서 최근 읽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생각나는군요. '생각하지 않은 죄'.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이성적인 생각입니다. 곧 'critical thinking'입니다. "학살자들은 말합니다. 정부가 우리에게 죽이라고 말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요. 하지만 누군가는 비판적인 사고로 말할 수 있지요. '어째서?'라고요.(Perpetrators say they committed crimes because 'the government told us to kill'. But someone with critical thinking skills can ask themselves, 'Why?')



르완다 커피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묘한 기분을 느꼈어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관심도 지식도 없던 르완다라는 나라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 근처 테라로사 카페에 가서 르완다 커피 콩을 1kg 샀습니다.


르완다 커피 농부의 57%가 여성입니다. 25년 전 너무 많은 남자들이 사라졌거든요. 르완다 커피는 아프리카의 희망입니다. 르완다 커피는 가난하고 자원이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성실한 노동과 평화에 대한 소망만 있는 르완다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지요. 오늘도 두 잔 내렸습니다. 아주 젊고 건강한 콩입니다. 앞으로 필터커피 마시면 그냥 '르완다 커피' 달라고 하려고요. 그전에는 그냥 '과테말라' 주세요 라고 말했었는데요....

르완드 커피농부들, 아프리카의 희망입니다



참고: 이 기사는 웹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rwanda, genocide, gacaca, paul kagame 등의 키워드를 사용해서 다양한 영문 웹자료를 읽었습니다. 하나하나 출처를 밝히기는 어려운 점 양해바랍니다. 그러나 워낙에 충격적인 내용이 많아서 사실관계를 여러번 확인하고 다양한 견해를 탐구하면서 작성했어요. 아래 기사도 읽어볼 만해요!


https://adst.org/2013/04/a-soul-filled-with-shame-the-rwandan-genocide-april-7-july-181994/

https://www.britannica.com/event/Rwanda-genocide-of-1994


https://www.peaceinsight.org/blog/2015/12/peace-education-rwanda/

https://www.interpeace.org/2019/12/healing-wounds-of-the-past-in-rw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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