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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Jan 11. 2020

기묘한 양자역학의 세계

31호 | 문과도 이해하는 과학이야기

양자역학이란 무엇인가?


양자이론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
어느 누구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저는 아주 편안하게 말할 수 있답니다.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


양자역학 '진짜' 전문가의 글을 읽어보면 아휴 수학식 수백 개가 나오더군요. 하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고등 수학을 잘 모릅니다.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전문가 흉내를 내보려고 수학식을 파헤치며 양자역학을 이해해 봤자 어차피 금방 까먹겠지요. 우리 같은 사람이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수학식 없이 양자역학을 알아보기로 해요.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듯한 설명이어도 최고 신뢰수준은 50%를 넘지 못하는 그런 글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참고할 만한 얘기는 될 것 같아요. 사실 양자역학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뿐입니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우주를 구하고 전사하셨지요.


자, 준비되셨나요?

양자역학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세계로 가는

신비 여행을 시작합니다.


생뚱맞게 철학에서 시작

1781년 인류지성사를 바꿔버린 책이 나옵니다. 독일 북쪽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근무하던 50대 후반의 철학과 교수가 아주 두꺼운 처녀작을 펴냈지요. 그 책의 이름이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저자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입니다.


이 책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하지요. 서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철학자들이 더이상 "신학/종교/신God"를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그렇지 않아요? 또한 '어느 순간'부터 서양의 사상가들이, 추상적인 '인간'보다는 구체적인 '개인'에 관해 말하면서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 의지, 주체성 혹은 주체성의 해체 등이 나오는 것인데요.


그 '어느 순간'이
바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되겠습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신학이나 종교처럼 절대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더이상 철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묵직한 선언문이었던 것입니다. 신학과 종교를 철학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러고는 인간이, 그것도 개인이 철학의 주인공이 되는 길을 개척했답니다.


양자역학을 이야기하는데 웬 칸트? 라고 하시겠지요.

그런데 이게 또 묘하게도 연결된답니다. 순수이성비판을 한문장으로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몰라도요 -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떤 사물을 감각(눈)을 통해 인식하며
그때 그 사물은 감각기관에 의해
즉시 영향을 받으므로
결국 감각에 의존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네 이성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해습니다. 우리가 신의 선물이라고 맹신했던 이성이 이렇게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리라고 '확정해서' 말할 수 없고, 형식(framework)만 남겨놓습니다. 물질(matter)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 이해가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므로, 결국 물질 그 자체의 원리와 비밀은 알 수 없습니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예요. 눈치 빠른 사람은 칸트의 결론이 상당히 양자역학적임을 느끼셨겠지요. 그러면 철학 이야기는 그만하고 물리학으로 들어가지요.


빛을 좀 아는 사람들

양자역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나요? 양자역학은 20세기에 갑자기 나온 학문이 아닙니다. 19세기부터 "빛"의 본질을 탐구하던 여러 천재 과학자들의 누적된 지식으로 등장했지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그 단어의 의미부터 이해하고 싶다면 다시 멋진 일주일 22화 <빛을 좀 아는 사람들> 링크를 클릭해서 쭈욱 살펴봐주세요. 꽤 도움이 될 거예요.

https://brunch.co.kr/@jwsvddk/64


이중슬릿 실험

토마스 영(1773~1829) 할아버지가 물리학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실험을 했습니다. 그때가 아마 19세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었어요. 아래 왼쪽 그림에서처럼, 빛을 슬릿 하나를 통과시켜요. 그다음 슬릿 2개가 있는 벽을 통과시켜요. 그런 다음 스크린을 관찰하는 거지요. 아주 간단한 실험이었어요. 이제 오른쪽 그림을 보세요. 슬릿이 1개 있는 경우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중슬릿을 통과시킨 다음에 스크린을 보면, 오른쪽 맨 아래 그림처럼 스크린에 간섭현상이 생겼어요. 빛은 입자(particle)가 아니라 파동(wave)이고, 그래서 스크린에 그런 간섭 무늬가 생겼다는 결론이, 영 할아버지의 실험이 갖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토마스의 영의 이중슬릿 실험

이해되시나요? 물리학을 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거 생각보다 어렵지요? 그래서 골프선수를 모셔 왔습니다. 골프선수가 골프를 칩니다. 골프 공을 이중슬릿 안으로 통과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아주 많이 칩니다. 그러면 뒤에 있는 스크린에는 두 개의 줄이 생기겠지요.


이제 골프공을 다시 빛알갱이라고 생각해 보지요. 그런데 뒤 스크린에 생긴 무늬는 저렇게 두 줄이 아니라 여러 줄의 무늬가 생기고 맙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이지요.


빛이 입자(particle)였다면, 즉 알갱이였다면 스크린 무늬가 저렇게 될 리가 없거든요. 알갱이는 두 구멍 중 하나만 통과하게 될 테니까요. 즉, 빛은 입자가 아니라 파동(wave)이라는 것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빛이 퍼져나가고, 그렇기 때문에 위의 간섭 무늬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서 빛은 ‘파동"임을 알게 됐습니다. 영 할아버지의 논문은 1801년 5월의 일입니다. 이 쇼킹한 소식이 유럽 학자들에게 신속하게 퍼졌고, 그렇다면 그 파동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19세기 유럽학자들의 과제가 되었으며, 그 결과 빛은 전자기파(EM)였음이 밝혀졌지요(이에 대해서는 제22호 기사 <빛을 좀 아는 사람들>에 소상히 연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할아버지에 의해 빛은 "입자"임이 다시 밝혀졌어요(1905년).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이 아닌, 빛이 입자임을 증명한 광전효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1921년). 그러니까 빛은 에너지를 전하는 전자기파인  파동이면서 또한 에너지를 전하는 입자인 것이 결론입니다(wave and particle duality - 어떤 알갱이가 파동으로 흘러가는구나, 라고 이해하면 절대 안 됩니다. '파동'이라고 할 때에는 알갱이가 아니라 그냥 흐름 그 자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파동이면 입자가 아니고, 입자이면 파동이 아닌 게 되거든요. 둘 중의 하나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파동-입자 이중성이 아주 헷갈리고 기묘한 겁니다. 특히 똑똑할수록 더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양자'(quantum)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한자로 말하면, 음양의 양이 아니라 양좀 더 주세요 할 때의 양입니다. 물리학자들은 궁금증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관심사를 확장합니다.


알았어. 빛은 그렇구나.
그런데 빛만 그럴까?

물질파(Matter wave)의 탄생

덴마크의 천재과학자이자 양자역학 코펜하겐 해석의 거목이시며 노벨물리학상 수상자(1922년)인 닐스 보어(1885~1962) 할아버지 등장하십니다. 빛의 이론을 원자모형에 적용합니다(1913년). 쉽게 설명하면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정해진 궤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면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는 이른바 보어 모델을 발표합니다. 빛과 전자가 매우 밀접해진 거지요.


이때가 아마 물리학의 황금기였을 거예요. 뼈대 있는 프랑스 귀족 가문의 드 브로이 공작(Louis de Broglie 1892~1987)께서 20세기 물리학의 역사에 동참하십니다. 전자기파인 빛은 파동이었는데 다시 보니까 입자이기도 했잖아? 그러면 거꾸로, 입자인 전자는 혹시 파동일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입자이면서 파동, 파동이면서 입자. 전자도 빛처럼 입자이면서 파동임을 드브로이 공작께서 간명한 수학식으로 제안하셨습니다(1924). 그것이 그 유명한 드브로이의 물질파(Matter wave)이며, 1929년 노벨물리학상 받습니다. 그리고 루이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은 1927년 클린턴 데이비슨과 레스터 가머의 실험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7대 드 브로이 공작


결국 입자인 전자도 이중슬릿 실험을 하면 '파동이니까' 똑같이 간섭현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물질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 세상 꼬라지는 엉망이 되고 말았지요. 모든 물질의 기본이 되는 가장 작은 물질은 입자이자 파동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계는 양자로 이루어져 있네.


더이상 기존 물리학으로는 안 되겠으니 과학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나눴겠지요. 그러면서 양자역학이 정립되었습니다.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잖아. 빛만의 특별한 이론이 필요해.

그러니까 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읽어봤니?

그런데 보어와 드브로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전자도 입자이면서 파동이잖아. 전자도 양자네. 빛이랑 똑같애. 아이 참 헷갈리네. 전자가 빛이야?

전자가 빛은 아니지... 그렇지만 헷갈리네. 그러면 용어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

그래그래.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 것은 몽땅 '양자'라고 부르자. 대신 우리가 양자라고 불렀던 빛 입자는 다른 이름을 붙여주자. '포톤(photon: 광자)'이라고 하자. 어때? 전자(electron)는 뭐 그냥 전자지.

전자가 입자라고 가정했던 이론은 모두 폐기야 폐기.

그런데 어떻게 물질이 연속하는 파동이면서 불연속하는 입자로 존재할 수 있지? 이게 과연 동시게 가능한 일이야?

그러게 신의 장난이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미치겠네.

(........)


양자역학 해석론


양자역학의 핵심은 "파동 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게 말이 안 됩니다. 물질은 연속하는 성질(파동)과 불연속하는 성질(입자)를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므로 반인반수의 괴물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얘기고, 그런데 실제로는 이 우주는 그렇게 존재한단 말이지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래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코펜하겐에 모입니다(1925~1927). 거기에는 초기 양자역학의 대두(진짜 머리가 컸다고 합니다) 닐스 보어가 있었습니다.


1927년 솔베회의. 여기서 양자역학의 핵심논쟁이 벌어집니다. 이중 17명이 노벨상받으심;;;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1901~1976)가 기초를 만든 코펜하겐 해석은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 주류 견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양자역학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1) 파동이기 때문에 파동함수(wave function)로 표현될 수 있어. 그런데 파동은 흐르잖아. 흐름은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고 보기 어렵겠지? 양자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는 그저 확률적으로 존재하게 돼. 아, 이 세계의 비밀은 결국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구나.
(2)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지니는 것은 아니야. 상보성이론(complementarity principle) 들어봤어? 빛을 포함해서 물질은 파동이면서 입자이지만, '동시에'는 아니야. 서로 보완해주는 것이지. 어떤 때에는 입자로 행동하고, 어떤 때에는 파동으로 행동하는 거겠지. 파동이어서 확정된 것은 없을 때에는 여러 상태가 가능성으로 중첩(superposition)되어 있을 뿐이야. 말하자면 사느냐 죽느냐, 삶과 죽음이 겹쳐져 있지. '어떤 때'가 언제냐고? 당신이 그 양자를 측정(measurement) 또는 관찰(observation)할 때, 바로 그때가 되는 거야. 그때 파동함수가 붕괴가 돼. 그러면 비로소 파동이 아닌 입자가 되지. 즉 중첩이 해결되고, 살든지 죽든지 어느 하나로만 결정되겠지. (파동함수가 뭐냐고? 구글링해 봐.)
(3) 양자의 위치와 속도(운동량),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정확하게는 측정할 수 없어. 어디에 있으면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른다는 거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상식적으로 이게 아주 말이 안 되는 거죠. 당신은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지 50% 혹은 72%로 살아 있는 건 아니니까요. 거시세계에서는 코펜하겐 해석이 모두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마치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몇 개가 됐다가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뭐 그런 얘기가 되거든요.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가 발사한 미사일을 생각해 보지요. 그러면 우리는 (1) 확률이 아니라 O아니면 X로 미사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2) 그건 관측과는 관계없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이며, (3) 그래서 미사일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요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런 세계입니다. 객관적이며 정확합니다. 관찰자의 감각(관찰)은 객관적인 리얼리티에 영향을 못 줍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미사일이 양자라면, 미사일의 존재여부와 정확힌 위치를 미리 알 수 없고, 관찰자의 관측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요격은 불가능합니다.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 망설여집니다.


닐스 보어는 말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를 구성하는

그 가장 작은 가짜(?) 세계는 다 그렇다고요.

그리고 그게 진짜(?) 세계라니까요.

'측정'되기 전까지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
- 닐스 보어


아인슈타인이 성을 냅니다. 장난하냐고요? 달이 원래는 두 개인데 관측을 하니까 달이 하나로 된 거냐고, 말장난하지 말라고 비난했지요.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늬들이 모르는 숨은 변수가 있겠지 라고도 말했어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틀렸음이 나중에 발견되었답니다. 숨은 변수 같은 건 없다고요;;;;) 그 유명한 파동방정식을 정립한 오스트리아의 천재 과학자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도 코펜하겐 해석론에 아주 비관적이었어요. 야, 이거 진짜 말이 안 되잖아. 늬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지 이 수수께기 좀 한번 풀어봐라. 슈뢰딩거 할아버지는 일종의 생각실험을 제안했어요(1935). 그 유명한 슈뢰딩거 고양이입니다. 진짜 실험이 아니라 '생각실험'입니다.


박스 안에 고양이 한 마리 넣습니다. 그리고 박스에 청산가리가 든 유리병을 준비하고 방사성 물질인 라듐이 붕괴되면 유리병이 깨지고 독약이 나와서 고양이가 죽습니다. 라듐의 붕괴확률은 50%이며, 상자는 아주 잘 밀봉돼서 누구도 안을 볼 수 없습니다. 자, 1시간 뒤에 고양이는 죽었을까요 죽지 않았을까요?


슈뢰딩거가 말하고 싶은 결론은 이겁니다. 아주 상식적으로 말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코펜하겐 해석의 논리는 1시간이 지났더라도 아직 '관찰하기 전이라면'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어 있는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있을 수 없다고 슈뢰딩거 할아버지는 생각했던 것이지요. 객관적으로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아니면 살아 있을 테니까는요. 코펜하겐 해석을 비꼬려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이것이 양자역학 해석을 더욱 활성시키는 메타포가 되었답니다.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해석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 아니었어요. 여전히 다수의 과학자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것 같더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관측'이 없다면, 입자는 파동함수의 지배를 받아 하나의 입자가 서로 다른 상태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의 알갱이가 동시에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포개져 있는 거지요.


이렇듯 관측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양자는 확률적으로 불확정성을 갖고 존재하지만, 관측이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파동이 사라지고 입자가 되며, 중첩이 해소되고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존재는 여러 가능성으로 중첩되어 있으며, 인간이 관찰함으로써 존재가 변경됩니다.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양자를 관찰하면 그때 양자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만약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양자'라면 그 닫힌 상자 안에서 죽은 고양이와 살아 있는 고양이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물리학자가 아니고 또 수식을 배제하기로 했기 때문에 수학식이 없는 것이지만, 코펜하겐 해석에는 수백 개 이상의 수학식으로 아주 촘촘하게 논리가 전개됩니다. 허튼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편, 다중 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해석도 있어요.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휴 에버렛(Hugh Everett 1930~1982)이 제기한 해석론입니다. 관측이 발생했을 때, 파동함수는 붕괴되고, 고양이가 살아 있는 세계와 고양이가 죽은 세계가 분리되어 "평행 우주"가 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해석이지요. 파동함수 붕괴에 대한 슈뢰딩거 고양이 역설을 제법 잘 피해가는 매력적인 해석론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게 아주 큰 약점이지요.


<파동 입자 이중성>이라는 특징은 "양자"에 대해서만 적용됩니다. 아원자 이하의 <아주 작은 세계>에서의 물리법칙이라는 말이지요. <큰 세계>에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파동 입자 이중성을 지니는 아주 작은 세계: 양자역학

속도가 느린 큰 세계: 고전역학

빛의 속도에 근접하는 큰 세계: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이 논란이 되고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까닭은, 우선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 이유는 우주의 신비로운 비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라고 해야 할지요. 하나의 통일된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해야 할지요. 많은 과학자들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잘 연결시키면 하나의 통일된 자연법칙이 정립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양자역학도 빛을 연구하다가 나왔고, 상대성이론은 마찬가지로 빛을 연구하다가 나왔으므로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렇게도 양자역학의 해석론에 부정적이었고 자기 독자적인 견해(숨은변수이론)를 피력했습니다만, 아인슈타인이 틀리고 말았지요.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코펜하겐 해석의 논리적인(수학적인) 성과이자, 아주 기묘한 상관관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까 슈뢰딩거 고양이에서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서로 '양자얽힘'으로 얽혀 있다고 이해하신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고양이'가 들어 있는 상자와 '죽은 고양이'가 들어 있는 상자를, 당신의 전능한 능력으로 분리해 내서 이 두 상자를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예컨대 하나는 지구에 하나는 다른 우주에)에 놔두더라도, 지구에 있는 박스를 열었더니 고양이가 살아있다면 다른 우주에 있는 고양이는 반드시 죽어있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에 지구에 있는 박스를 열었더니 고양이가 죽어 있다면 다른 우주에 있는 고양이는 반드시 살아있습니다. 동시에 일어납니다.


양자얽힘은 두 입자 사이의 관계입니다. 입자 A와 입자 A' 사이의 신묘한 의존관계이지요. 관측이 없을 때, 입자 A와 입자 A'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직 통계적으로나 확률적으로만 존재할 뿐 객관적으로/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측을 하면 그 즉시 존재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이 바로 결정되듯이 말이지요. 바로 그때 입자 A가 발생하면 입자 A'도 그 즉시 발생합니다. 아주 편의적으로 예를 든다면, 짝수/홀수 관계가 이 양자얽힘의 의존성이라면, 입자 A가 짝수로 관찰된다면, 입자 A'는 그 즉시 홀수가 됩니다.


아래 그림은 두 양자의 양자 얽힘을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상자 안에 있는 구슬의 색채와 열리는 문이 다르네요. IQ 시험문제 같군요.

이런 양자얽힘을 이용해서 연구되는 기술이, 양자전송, 양자컴퓨터, 양자암호기술입니다. 마치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어서 아주 재미있지요. 정보라는 것은 의미있는 값입니다. 양자얽힘에 의해 두 개의 입자가 동시에 상관된 행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먼 우주에 있는 사람이 얽힌 입자를 통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빛보다 빠르게 달려가서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빛보다 빠른 물체는 없다는 상대성이론이 붕괴되겠고,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찾아야만 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야기한 결론을 재인용합니다. 감각 --> 관찰로 바꾸지요. 결국 같은 말이니까는요. 양자역학은 관찰에 의해서 존재가 결정됩니다. 관찰을 통해 존재하는 세계이지요.

우리는 어떤 사물을 
관찰을 통해 인식하며 
그때  사물은 관찰에 의해 
즉시 영향을 받으므로
결국 관찰에 의존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네 이성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  없다.'


그 밖에도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물리학자가 아닌 제가 더 덧붙이더라도, 그저 불명확하거나 부정확한 혹은 잘못된 설명이 더해지겠지요. 아니면 망상이나 영화 시나리오 같은 얘기, | 예를 들어, 우리 인간과 인간세계는 양자가 아니지만, 실제 양자세계와 우리 인간 사이의 크기를 비교해 보고, 우리와 우주 사이의 크기를 또 비교해 본다면, 아주 큰 우주적 존재의 관점에서는 우리도 양자가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하고, 그렇다면 절대적/우주적 존재도 양자역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 수 없고, 그래서 절대자를 부르는 행위를 하는 것이며, 그렇게 기도에 응답하여 절대자가 "관찰"하심으로써 인간의 존재가 확정상태에 이르고, 이것은 말하자면 불확정상태로부터의 구원이 되겠구나 | 라는 아주 비과학적인 이야기만이 더해지겠으나, 이것은 더이상 과학이 아니므로, 이만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희망합니다.



최근 코디정이 편집한 책


http://aladin.kr/p/8fL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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