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디정 Mar 14. 2020

도덕에서 버려진 것들

39호 | 이과도 즐길 수 있는 철학이야기


우리 인류가 도덕에서 버린 것들


도덕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쩐지 케케묵은 인상을 줍니다.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올드한 느낌이잖아요? 시대에 뒤쳐진 고리타분한 생각처럼 들립니다. 저도 그랬어요. “도덕?” (체념하듯) “아, 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올드한 얘기는 아니에요. 오히려 생각보다 쿨해요.


오늘날 도덕은 옛날 옛적과는 다르거든요. 서구화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조선시대와는 완전 달라졌으니까요. 과거와는 아주 딴판이 됐습니다. 자, 들어가 볼까요. 도덕의 세계로.


먼저 위계질서는 도덕과 상관없습니다.


권위에 도전하고 어른한테 개기는 행동은 도덕과 상관없다고 보는 게 오늘날의 통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본인한테 유리하지는 않겠지요. 딱 그 정도 수준 아닐까요? 위계질서를 도덕처럼 여기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권세 있는 양반으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야 그분들에게 조선시대가 좋았겠지요. 그러나 양반이 될 확률은 10% 미만, 노비가 될 확률은 40% 정도되겠습니다. 후자로 태어나면 도덕이랄 것도 없이 비찬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현실은 21세기 한국입니다.


거친 언행과 품행 방정도
그다지 도덕과 상관없습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손해를 볼 수는 있어도 날라리라는 이유만으로, 성격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인 비난의 대상은 못 됩니다. 입이 거칠고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도덕 운운하는 ‘도덕교사’와 함께라면, 아 정말 재미없겠지요. 평생 거친 사람은 드뭅니다. 그게 인생을 사는 데 자신한테 불리하다는 점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유불리가 도덕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벌금과 과태료 대상이 되는
국가나 자치단체의 규정은
‘대체로’ 도덕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런 규정들은 공공질서를 바로잡고 괜한 다툼을 방지해야겠다는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졌거든요. 공공성이야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규정을 어겼다고 해서 그런 사실만으로 ‘반도덕’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지정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 흡연? 음주운전? 그냥 응당한 처벌을 받을 뿐입니다. (음주운전이 왜? 라고 말씀하시는 분 있을 것 같군요. 음주운전에 의한 살인은 도덕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음주운전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처벌의 대상은 되지만 도덕의 대상은 되기 어렵지요. 원인의 원인를 따지는 것은 정책적인 문제이니까요. 음주운전 문제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시 다루기로 해요.)


그러면 대체 도덕이 뭔데?
 

라고 물으시겠지요. “무엇이 좋은(good) 행동인지 결정하는 규범”을 생각해 보는 것이 도덕입니다. 그런 규범이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를 낳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좋은 규범(법률이나 기준)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 없는 도덕은 무의미(앙꼬 없는 찐빵)하고, 규범 없는 도덕은 무용합니다(찐빵 없는 앙꼬).(켁)


제가 ‘good’이라는 아주 뻔한 영어 단어를 썼군요. 사실 도덕은 서양철학에서 나와서 발전한 ‘학문’입니다. (아쉽게도 동양의 사상은 현대의 도덕철학에 크게 기여를 못했습니다. 뒤에서 그 까닭을 잠깐 다룹니다.) ‘good’은 ‘좋음’으로 번역해도 좋고, ‘선함’도 좋으며, ‘훌륭함’이라거나 ‘올바름’으로 번역해도 되는 단어입니다. 아니, {좋음, 선함, 훌륭함, 올바름}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일 수도 있겠네요. <어떤 행동의 good>을 탐구하는 학문이 도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윤리학(ethics)이라고도 하고요.


우리 인류는, 21세기까지 진화하면서, 세 가지를 도덕에서 버렸습니다.


첫째, 마음가짐입니다.

한때 우리 인류는 도덕을 마음가짐으로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이야말로 도덕이라고 가르치고 또 배웠습니다. 대부분의 동양사상은 ‘인’이니 ‘의로움’이니, 아니면 ‘충’이니 ‘성’이니, 그것도 아니면 ‘예’라거나 ‘법’이라거나 하면서 마음가짐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공자왈 맹자왈 했던 것이지요. 아, 아주 소수였겠지만, 도를 얘기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마음씨가 고우면 보기도 좋습니다. 행동도 올바를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마음씨 나쁜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하면 도덕적이지 않습니까? 거꾸로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이 마음씨가 곱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인 비난을 피해가도 되는 건가요? 마음가짐을 강조한 동양사상은 현대의 도덕철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동양사상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포함되는 이야기입니다. 플라톤 할아버지는 덕(virtue)을 칭송했으나 그게 알고 보면 공자님 '인'과 비슷한 마음가짐이었어요. 어쨌든 도덕을 말하면서 마음가짐을 강조하면 옛스럽다라는 겁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


둘째, 종교입니다.

우리 인류역사에서는 어느 곳이나 종교의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요. 종교의 황홀함은 우리 인간을 다른 차원의 높이로 올려주곤 합니다. 하지만 종교에는 저마다 꼭 지켜야 하는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이 곧 도덕이었습니다. 여러분,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다 학습했잖아요? 아주 끔직했지요. 지금도 중동 어디에선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옛날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척과 마녀사냥과 살인과 테러가 정당화되었으니까요.. 현대 도덕철학의 꽃인 ‘생명’과 ‘인권’은 종교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래서 현생 인류는 도덕에서 종교를 풀어줬지요. (실은 종교가 묶어놓은 밧줄을 우리 인류가 풀어낸 것입니다만;;;)



셋째, 권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사상은 국가권력에 맞서는 것을 반도덕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곤 했어요. 아니면 그렇게 오해되었거나요. 그러나 현대의 생각에서는 임금이건 무엇이건 권력에 충성하는 것은 도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왕의 규범이 따로 있고 신하의 규범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거나, 주인이 지켜야 할 도리와 노예가 지녀야 할 덕이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옛 생각이라면, 그건 현대의 도덕과는 무관합니다. (유교적인 도덕이 오늘날 한국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일단 이 시대는 만인이 평등하므로, 그 평등한 만인의 도덕이 필요해졌어요. 물론 지위와 역할에 따라서 지녀야 할 태도와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리더십이나 팔로어십에서 다뤄야 할이야기이지, 도덕 얘기는 못됩니다.


1884년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3일천하로 실패했지요. 정변에 연루된 사람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서재필의 동생 서재창은 19세 나이에 오늘날 서울시청 근방에서 능지처참당했습니다. 처형이 아니라 능지처참입니다. 일가족이 연좌하여 처형/자살/노비로 처벌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잔인함이 도덕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지요. 권력이 자행한 야만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한 장면을 묘사한 당시 일본신문 삽화


인류사를 이곳저곳 시대순으로 혹은 지역별로 찾아보면 권력이 도덕의 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현생 인류는 도덕에서 권력을 놓아줬습니다. (물론 권력이 옭아맨 밧줄을 우리 인류가 끊어낸 것입니다)


이렇듯 마음가짐과 종교와 권력을 도덕에서 제외하고 나니, 무엇이 남았을까요?


‘행동’만이 덩그렁 남게 됩니다.


그 행동은 마음가짐과는 무관하고 종교나 권력과도 상관이 없는 온전한 어느 한 개인의 행동입니다. 이제 우리는 차분히 그 행동을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행동을 평가해 줄 ‘보편적인 규범’을 찾으면 되겠군요. 이것이 바로 현대의 도덕철학입니다. 


그 역사가 삼사백 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우리 조선 땅에서는 불과 백년도 안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인류사 관점에서 도덕이란 올드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며 또한 쿨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버려진 유령에 사로잡혀 있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무엇이 도덕이냐를 두고 여러 사상이 있습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요.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두 가지 사상만 이해하면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도덕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누구?


홍 코너: 언제나 지혜로운 조언을 하는 칸트 할아버지의 도덕철학
청 코너: 영국의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참으로 인간적인 공리주의 사상



이 두 가지 조류는 도덕에 관해 거의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답니다. 무협지의 정파와 사파 싸움 같지요. 누가 정파고, 누가 사퍄냐고요? 자기가 따르고 싶은 쪽이 정파겠지요.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이 서로 악수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해도 괜찮고요.


도덕에 관한 청 코너와 홍 코너 선수들 이야기를 좀 해야겠으나, 너무 길어져서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이포그래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