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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21. 2020

도덕의 이편과 저편

40호 | 이과도 즐길 수 있는 철학이야기

스크롤 압박 있어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천일을 공부했답니다.

그래도 십 분 정도면 다 읽습니다.

마치 서너 권의 책을 깊이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즐겁게 읽어주세요!


도덕의 이편과 저편


철학계의 기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할아버지는 자신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칸트의 주저를 읽은 사람이 그로 인해 정신에 받는 영향은 장님이 눈 수술을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칸트 철학은 그것을 파악한 모든 사람의 머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그 변화가 너무 커서 가히 정신적 거듭남이라 일컬을 만한다."


쇼펜하우어 할아버지가 철학을 얘기할 때마다 반드시 칸트를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셨어요. 그래요. 칸트를 읽으면 '정신적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지요. 그는 철학사에서 “자유로운 개인”을 발견하고 그 자유를 완벽하게 옹호해낸 최초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한국인에게는 칸트를 이해하기가 많이 어렵습니다. 국내 번역서? 제정신으로 읽을 만한 번역책이 거의 없답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번역자들의 한국어 수준이 마뜩지 않고, 번역어로 사용한 한국어 '철학용어'가 뭔 뜻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칸트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거나 이해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아는 척하면서 인터넷과 책을 통해 잘못된 지식을 너무나 많이 쏟아낸 탓에 "칸트는 어려워"라는 편견과 오해가 확대재생산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부터 시작합니다.



도덕의 이편, <나의 도덕>을 위하여


우리 인류사에서, 종교든 권력이든 절대적인 진리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요? 칸트는 먼저 절대적인 진리에 대못을 박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철학적인 지평을 엽니다.


칸트는 비판철학으로 유명하지요. 뭘 비판? 이성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뭐하게? 이성의 한계를 밝히겠다는 것이지요. 당시 18세기는 인류가 지적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던 시절입니다. 고전역학도 확립되었고 우주의 진리를 제법 알게 되었으며 계몽주의가 전진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무엇이든 진리를 알려줄 듯한 분위기였을 거예요. 그 시절에 느닷없이 이성의 한계를 말했어요. 그게 뭔데? 인간 이성으로는 "사물 그 자체"를 알 수 없다는 것. 응? 알 수 없으면 알 수 없는 거지 그게 뭐? 칸트는 플라톤 이후로 2000년간 지속되었던 말하자면, 진리탐구의 역사에 비로소 종지부를 찍은 겁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얘기는 칸트철학에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완벽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얘기만이 있지요.


이게 결론적으로 인류 지성사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와요. 지식 교사(그게 종교든 권력이든 누구든)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해 버렸거든요. "남이 가르쳐주는 절대적인 진리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네 멋대로 생각해도 괜찮아"와 같은 의미가 됩니다. (네 생각을 강요하지만 않는다면야...) 그래서 칸트철학은 "개인-주체성"의 시작점이 되는 거지요. "우와, 나도 내 맘대로 생각할 수 있다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칸트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감각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그때 그 대상은 감각에 의해 즉시 오염되고 말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의 진정한 본모습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지식을 얻으려면 경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칸트도 경험을 많이 강조합니다. 하지만 경험에 의해 대상에 관한 지식을 얻더라도 사람마다 그 경험이 다 다르잖아요. 우리는 경험에 의해 오염된(영향을 받은) 지식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성은 똑똑한 판단을 할 때도 많지만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 그 자체는 알 수 없다고,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게 도리라는 얘기이고요. 이런 얘기를 베개 두께만큼의 책으로 촘촘하게 규명합니다. 여기까지가 그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의 결론입니다.


아, 이성이 별 쓸모없었네?


그때 칸트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성의 역할이 따로 있다네. 그러면서 칸트 특유의 도덕론을 펼칩니다. 우리 인류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탄압받고 살해당했을까요? 칸트는 그런 '무서운 도덕'에도 대못을 박아버리지요. 그리고 도덕을 공적인 영역이 아닌 사적인 영역으로 바꿔버립니다. 칸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각색해서 들어보지요.


"이성은 진리를 알아내는 데 무능하지만, 그러라고 이성이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네. 이성은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선한 의지(Good will)를 낳는 게 자기 본연의 역할이었던 것이지. 이성은 도덕법칙(도덕법률)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네. 무엇이 도덕인지 철학자에게 혹은 훌륭한 사람에게 물어볼 것도 없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잘못된 답을 내놓는 법. 남한테 찾지 말고 너 자신한테서 찾게나. 누구에게나 선한의지를 낳는 이성이 있고, 그것에 귀의하면 돼. 도덕을 바깥에서 찾지 말고 네 안에서 발견하게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그 자유의지로 스스로 답을 찾게나. 다만, 선한의지를 낳는 것이 이성의 참된 역할이자 권능인 것을 내가 알겠는데, 이러한 이성의 역할과 권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그건 나도 모르겠네." 이것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내용입니다.


아, 그렇구나. 근데 뭐지? 뭔 말이지?
<나의 도덕>만 생각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남의 도덕> 같은 것에서 도덕을 찾지 말라는 얘기이고요. 칸트 할아버지는 "이것이 도덕이노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덕이니, 저것이 도덕이니' 하는 "온갖 내용"을 모두 도덕규범에서 빼냅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의 취향이나 성향이나 경험이나 기질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 저마다 다르니까요. 그래서 형식만 남겨둡니다. <나의 도덕>이 될 수 있는 형식입니다. 그 형식이 뭐냐고요?


나는 가치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개똥철학이든 뭐든 어쨌든 누구나 가치관을 가질 수 있잖아요? 칸트의 도덕철학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그 가치관"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그 가치관을 "준칙(Maxim)"이라고 표현하지요. 칸트가 말하는 것은, "니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이제부터 말하는 세 가지 형식에만 맞는다면 그 가치관이 바로 도덕법이라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형식이 무엇인지만 알면, 칸트의 도덕철학을 잘 이해한 겁니다.


칸트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세요. 그러면 감전됩니다. 칸트가 1785년에 저술한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라는 책에 그의 탁월한 얘기가 들어 있지요. 이 책을 번역한 여러 판본이 있습니다만, 학문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중에서 이 책이 가장 좋습니다. (제가 편집했으니까요;;;) 교보문고 오늘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답니다.

http://aladin.kr/p/YKpko


어쨌든 칸트는, 이런 행동을 해야 해, 저런 행동을 하면 안 돼.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선한 행동이라며 직접적으로 도덕의 내용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칸트철학과 전혀 무관합니다. 칸트는 그저 인간(이성적인 존재)이라면 누구나 가치관을 가질 수 있고, 그 가치관이 도덕법에 딱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는 아주 쿨한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이야 뭐라든, 내 가치관이 딱 좋으면 끝, 이라는 거지요. 자세한 것은 있다가 다시 다루니까, 일단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도덕의 저편, <우리의 도덕>을 위하여


칸트 할아버지의 <나의 도덕>은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혁신적이었고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무엇이 도덕인지를 남이 정해 놓은 규범/교리/법규에서 찾지 말라고 하지만, 이걸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국가의 공공복리와 공교육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유용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가 지금껏 가르쳐온 도덕교육과는 너무나 달라서 교육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만약 칸트의 도덕철학을 듣고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면 그건 칸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주 예리하게 지적한 사람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입니다. 여러분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유용한 경험을 전하고, 훌륭한 미덕을 가르치며,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합의해서 정해둔 규범을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사회 구성원에게 직접 가르치지 못한다면 도덕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용'이 없는 도덕이
공공복리에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실용적인 영국인답게 밀은 칸트철학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들어갔지요.


존 스튜어트 밀은 1861년 <공리주의>라는 책을 펴냅니다. 밀은 이 책에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질적 공리주의"를 주창합니다. 질적 공리주의야말로 가장 훌륭한 최선의 도덕철학이라고 믿는 밀은 쾌락과 행복이야말로 도덕의 내용이며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복론>이 공리주의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까지 두루 생각하는 넓은 의미입니다. 그가 말하는 "질적 쾌락"은 충분히 아름답기도 하지요.


"더 나은 쾌락을 선호하면 행복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시 말해 비슷한 상황이라면 탁월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지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과 만족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궁핍한 인간이 낫고, 만족해하는 멍청이보다는 못마땅해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낫습니다. 만약 그 바보가, 혹은 그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갖는다면 그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혹은 인간은 문제를 두루 생각합니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가르쳐온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은 황홀경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능동적인 즐거움이 수동적인 쾌락을 단연 압도하도록 기틀을 잡고 인생이 줄 수 있는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고통은 적고 일시적이지만 다양하고 많은 쾌락으로 이루어지는 인생의 순간순간을 행복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구축된 삶을 운 좋게 누려본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삶이야말로 행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상당 기간을 그런 존재로 지내는 것이 지금도 많은 사람의 행운이지요. 처참한 교육과 형편없는 사회제도가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삶에 도달하려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입니다."


밀은 쾌락과 행복을 제시하면서, 최대행복의 원리야말로 "도덕의 제1의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려면 그런 쾌락과 행복을 앞서 경험해본 사람의 경험담이 중요해지고, 따라서 경험이야말로 도덕규범의 알맹이가 되는 겁니다. 또한 밀은 인간의 감정이 쾌락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므로 도덕감정을 빼고 도덕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 칸트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칸트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사실 지금도 그렇지요). 영국의 '작은 학자'인 밀이 대철학자 칸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격이 맞지 않으니까는요. 그래서 밀은 칸트와의 도덕전쟁을 이기기 위해 효과적인 전략을 짜냈지요. 칸트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의 전승자로 간주하고, 자신은 스토아학파의 사상적 경쟁자 그룹이었던 에피쿠로스학파의 계승자임을 천명하면서, 이천 년 이어져온 학파 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게 먹혔어요. 성공적이었고요. 그래서 지금도 도덕철학에서 칸트가 나오면 바로 영국의 공리주의가 뒤이어 등장하는 법입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이 <나의 도덕>에 관한 사상이라면, 공리주의 도덕철학은 <우리의 도덕>에 관한 사상입니다. 칸트가 <개인의 선한의지>를 강조했다면, 공리주의는 <최대행복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칸트가 도덕에서 도덕법률(도덕법칙)이라는 개념에서 도덕의 내용을 빼냈다면, 공리주의는 도덕법에 다시 내용을 채워넣습니다. 타인이 만들어낸 도덕의 폭주가 개인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칸트가 쿨하게 막아냈다면, 공리주의는 개인을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하면서 복지와 사회제도 개선에 기여했습니다. 칸트는 소극적이고 공리주의는 적극적입니다. 구체적인 차이를 언급하기 전에 대략 이런 차이점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보세요. 그러면 역시 감전됩니다. 밀이 1861년에 저술한 <공리주의>라는 책에 그의 탁월한 얘기가 들어 있지요. 이 책을 번역한 여러 판본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이 책이 제일입니다. (이 책도 제가 편집했으니까요^^)

http://aladin.kr/p/o2hvh



도덕의 이편과 도덕의 저편과의 대화 게임


제법 간단하게 도덕의 이편(칸트)과 도덕의 저편(공리주의)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서로 대화를 해보지요. 저승에 있는 칸트와 밀을 불러와서 직접 대화를 시킬 수는 없으니까, 가상의 시나리오를 짜보겠습니다. 대화게임입니다. "니나"라는 이름의 칸트주의자와 "라라"라는 공리주의자를 선수로 모십니다. 니나는 홍 코너에 있으며, 청 코너에는 라라가 있습니다. 자, 이 두 사람의 대화 게임을 하기 전에, 광고를 먼저 보시지요. 이 광고를 꼭 읽으셔야만 이 대화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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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에 대하여

니나: 라라, 도덕은 행동에 관한 거잖아요?


라라: 그렇지요. 올바른 행동, 선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게 도덕입니다. 그러려면 의무(duty)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라는 의무를 지키는 것이 도덕입니다.


니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의무가 없다면 도덕도 없겠지요.


라라: 그 의무가 적혀 있는 규범집이 있다고 생각해 보지요. 그 규범집이 도덕법률(Moral law: 도덕법칙)입니다.


니나: 네.


(별 다툼이 없네)



경험에 대하여

라라: 도덕법은 무엇이 좋은 행동(선한 행동)인지를 규정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교육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훌륭한 경험들은 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좋은 경험은 전승되고 그것이 계몽의 빛이 됩니다. 또한 그런 경험들이 모여서 국가의 법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는 등의 수많은 규범은 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거랍니다. 경험법칙이라고 하지요. 지혜와 지식을 구하세요. 그러면 그럴수록 도덕에 대한 감각이 예리해집니다. 좋은 경험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럴수록 도덕적으로 훌륭해집니다.


니나: 좋은 말씀이에요. 그런데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처럼, 그리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경험을 통해 얻는 깨달음과 지식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생각을 예외 없이 일치시켜서 무엇이 진리다라고 말하면 무섭잖아요? 그게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경험을 하나로 일치시켜서 법을 만들면 다수의 경험에서 고통을 겪는 소수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도덕이 소수자를 핍박할 것 같은데요? 다수자뿐만 아니라 소수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그러므로 경험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규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라라: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정이 있어서, 그것에 맞는 행동이라면 도덕적이라고 말하고, 그런 보편적인 규정을 어기면 도덕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본다면 그것도 좋네요. 그런 주장은 당연히 인정합니다. 훌륭해요. 그러나 도덕은 여러 가지예요. 그런 보편적인 도덕도 있는 법이고, 여러 개의 도덕이 서로 얽혀서 우열을 겨룰 때도 있고, 또 어제의 우월했던 도덕론이 오늘이 돼서는 상황이 바뀌어 다른 도덕론에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도덕철학은 이토록 다양한 도덕현실을 반영해야 합니다.


니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도덕이 아니에요. 왜 모든 걸 도덕문제로 생각합니까? 인간적인 매력이나 교양, 더 괜찮은 문화적이거나 위생적이거나 혹은 정책적인 행위 아니면 심리학적인 문제로도 다룰 수 있는 사항까지 도덕법으로 끌어들이면 도덕은 잡탕이 됩니다. 의무는 남발되고요. 그렇게 안 해도 되잖아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보세요. 제가 생각하기로 만인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합의사항은 딱 하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라라: 그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의 초대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이렇게 말했답니다. "Happiness and moral duty are inseparably connected." (발음 어땠어요?)


니나: (아주 좋은 영국식 발음이었어요!) 그렇지만 행복은 아니에요. 라라가 생각하는 행복과 니나가 생각하는 행복은 행복이라는 단어만 같을 뿐 추구하는 게 같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그저 라라와 내가 똑같이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은 존엄하다는 사실, 이 사실만큼은 언제나 변함없이 같습니다.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역시 이 문제는 합의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라라: 말장난 하시는 거예요, 니나님?


니나: 설마요. 어쨌든 도덕법에서 경험을 빼야 된다는 게 제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경험을 제외하고 남는 규칙, 그것이야말로 도덕법인 것 같아요.


라라: 아니, 경험을 빼면 지식이 사라지고, 지식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을 두고 우리가 도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식과 지혜가 빠져버리면, 도덕교육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게 겁니다. 공공복리와 타인을 배려하는 인간질서도 약해질 거예요. 정신차리세요 니나님, 예를 들어 인의예지를 말하는 옛 선현들의 교훈과, 용기와 덕과 협동과 인내와 인도적인 도움 같은 것을 도덕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만다니까요. 경험을 빼면 이렇게 부작용이 생겨요.


니나: 왜 모든 것을 교육을 통해 가르쳐야 하나요?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 인류가 갖고 있는 이성에는 이미 도덕법칙이 새겨져 있어서 그것을 각자가 깨달을 수도 있다는 점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시나요? 누구에게나 선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상태에서 도덕을 생각한다면, 우리 이성에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는 참된 도덕법칙을 더 온전히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덕론에 대하여

니나: 경험이 없어도 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경험이 다 달라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같겠지요.


라라: 네. 이성적인 존재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어요. 데카르트 할아버지의 그 유명한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처럼. (코기토 에로고 숨 (Cogito ergo eum!) 이 라틴어는 어때요?)


니나: (역시 라라는 발음이 좋아요.) 마치 그런 것처럼, 경험과 무관하게 어쨌든, 나는 내 개똥철학, 내 가치관(준칙(Maxim)이라는 표현을 알기 쉽게 '가치관'이라는 단어로 바꿨습니다)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나는 내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겠습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 도덕적이라면 그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그 행동도 도덕적이지 않겠습니까?


라라: 개인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그 행동의 동인이 되는 가치관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인데, 어째서 그렇게 간접적으로만 생각하나요? 좀 대범하고 진취적으로 생각해 봐요.


니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도덕성을 논하면, 도덕을 말하는 사람들의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다시 경험과 성향과 감정과 상황이 쏟아져나와서 도덕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어느 한 개인의 도덕문제에 타인이 개입하고 말고요. 구체적인 행동이 아닌, 그 행동의 동인이 되는 가치관만을 살펴본다면 경험에서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온전히 그 개인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라라: 도덕문제는 결국 '우리의 도덕'입니다. 타인이 개입할 수밖에 없고 개입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도덕은 너무나 중요해서 그냥 개인에게 맡겨버릴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 개입이 <올바른 도덕론>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니나: 저는 도덕문제는 "나의 도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내 스스로 올바른 가치관을 선택하는 자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아까 말한 "내 가치관(준칙)"이 다음 세 가지 문장에 맞는다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첫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가치관을 선택하겠습니다.

둘째, 인류애에 부합하는 가치관을 선택하겠습니다.

셋째, 타율적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선한 가치관을 선택하겠습니다.


라라: 니나의 이런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보세요. 지금 말하는 세 가지 문장은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준이 못됩니다. 그저 자기 가치관의 선택 문제로 도덕을 말하고 있잖아요? 가치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는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고요. 사람들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더라도 그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잖아요? 자기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다고 보나요?


니나: 이성적인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선한 의지가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해." 라거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마"라고 우리는 흔하게 말합니다.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해하지요. 그때의 이성이 바로 선한의지에 키워줍니다. 그리고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야말로 가치관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인류에 의지하세요.


라라: (털썩) 악한 의지도 있잖아요? 도덕교육은 사람들에게 "이런 행동이 도덕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덕은 내용이어야 하지 그런 문장형식으로는 터무니없어요. 우리 인간은 어떤 행동의 결과를 보고 공감하며 박수를 치거나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으면서 비난합니다. 이런 도덕감정을 고양하려고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뒤로 물러 서서 가치관 타령만 하다니, 니나는 지나치게 나이브해요. 만약 우리가 도덕을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이런 행동이 도덕이다"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악행을 일삼고도 그것이 악행인지를 깨닫지도 못하며 반성하지도 않으려고 할 거예요. 예컨대 사람의 자유와 인권은 너무나 쉽게 핍박을 당하잖아요. 자유를 옹호하고 인권을 지키는 행동이 도덕적인 행동임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교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니나: 그렇지 않아요. 몇 번을 얘기해도 제 진심과 본뜻이 라라한테 전해지지 않아요. 모든 상황을 어째서 도덕에 포함시키려고 합니까? 도덕은 인간에게 최고의 법률입니다. 그러려면 최고 법률답게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어야 하고, 그것은 당연히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마치 헌법이 인간활동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최고법률의 지위를 갖는 것과 같은 거라고요. 물론 도덕이라는 헌법은 국가의 헌법과 달리 인간 개인의 마음속에 이미 새겨져 있어요. 자율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도덕법칙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덕교육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올바른 가치관을 선택하도록 가르치고, 그렇게 선택된 가치관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라라: 당장 급박한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행동을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행동을 선택할지 안내해주는 제1의 원칙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그 행동들에 이런저런 장단점이 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고, 그럼에도 특정 행동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제1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덕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런 제1의 원칙으로 '최대행복의 원칙'이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행복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은 없어요. 그렇다면 행복이 도덕의 내용이 돼야 합니다. 이때의 행복은 고통의 감소와 즐거움의 증진을 뜻합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까지 고려한, 지금 인류의 행복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 인류의 복리까지 두루 생각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제1의 원칙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항상 무엇이 인류의 더 큰 행복에 기여할지를 기준으로 삼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니나: (체념) 헌법은 법률이 문제가 될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지위를 갖습니다. 도덕도 마찬가지예요. 논쟁을 끝내주지 못한다면 도덕법률이 아닙니다. 제가 위에서 세 가지 문장을 제시한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요. 그 문장에 적합한 가치관에 따른 행동이면 도덕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에서 벗어납니다(선한 행동도 아니고 악한 행동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중립지대의 행동도 매우 많잖아요?). 그러나 최대행복의 원리에서는 무엇이 최대행복인지를 두고 계속 논쟁을 해야 합니다(예컨대 트롤리 딜레마). 그러면 최고의 도덕법률은 될 수 없습니다. 이점이 라라의 약점이에요. 행복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거라고 말씀하셨나요? 누군가의 고통이 있음에도 다른 누군가의 쾌락이 늘어났다는 것을 이유로 어떻게 도덕론이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겠어요? 그것이 라라 생각의 더 큰 약점이에요. 그런 경우까지 도덕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의 도덕인가 우리의 도덕인가

칸트철학과 공리주의 철학을 니나와 라라의 목소리로 들어봤습니다. 어떤가요? 이렇게 제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짜보는 게 과연 타당한지는 모르겠어요. 정확하지는 않을 거예요. 더 정확하게는 칸트 할아버지와 밀 아저씨의 책을 직접 읽는 게 좋습니다.


어쨌든 칸트는 <나의 도덕>에 적합한 말씀을 합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생각하면서, 나의 선한 의지로, 자율적으로, 남이야 뭐라든, 올바르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데 적합한 안내를 해줍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지혜입니다. 또한 부모가 자식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칸트철학만큼 좋은 철학도 없지요.


반면 공공기관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칸트의 도덕철학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활동을 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이 생기고 그 상황에서 우리 인류는 알맞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런 행동에 칸트철학은 도덕적인 축복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 공리주의의 지혜가 도와줍니다. 공리주의는 <우리의 도덕>에 적합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사회의 복리와 정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칸트철학과 밀이 말하는 공리주의를 간편하게 표로 정리해봤어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한글 번역본인 <타인의 행복: 공리주의> 편집여담에 수록된 겁니다. 제가 만들었으니까 제가 사용해도 되겠지요.


존 스튜어트의 밀 <타인의 행복: 공리주의> 편집여담에서

도덕철학과 정의론

도덕과 정의는 양자 모두 "Good"(선함, 좋음, 훌륨함)을 말하며 "행동"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비슷합니다만 또 상당히 다릅니다. 도덕철학은 개인적이거든요. 반면 정의론은 사회적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철학에서 도덕은 사적영역입니다. 공적으로 확장할 이유가 없었지요. 내 안에 있는 인류(humanity)와 당신 안에 있는 인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나의 도덕"에 대한 분명한 인식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행복론에 기초한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적영역으로 도덕을 바라봅니다. 도덕은 타인의 행복까지 염두에 둬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공리주의는 정의론과 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밀의 <공리주의> 제5장이 "정의와 공리의 관계에 관하여"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는 공리주의처럼 <정의>를 직접 다루지는 않습니다. 칸트철학에서는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라는 관념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인간을 저마다 목적으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가치관(준칙)을 보편적인 법칙에 자율적으로 맞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른바, "목적의 왕국"에서는 타인의 행동을 심판하는 그런 정의론이 잘 어울리지 못할 테니까요. 칸트에게 그것은 이성 본연의 역할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도덕은 정의가 아닙니다. 정의가 도덕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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