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가지 말아야 해
"7월 3일에 서울시대표 선발 본선 1차가 있다. 우리 세라초는 A조에 속해 있고 곡현초, 구르미초, 동혜초와 같은 조다. 그리고 조 2위까지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할 수 있고."
'곡현초...' 은정이는 곡현초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다. 4년 연속 여자 플라잉디스크 1위를 한 강팀이고 작년 6학년 언니들이 곡현초에게 0:9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구르미초도 작년에 세라초를 7:1로 이겼던 강팀이고 전국대회 진출을 늘 턱 밑에서 놓친 학교다. 동혜초는 우리 학교와 수준이 비슷하지만 그래도 우리 학교보다는 강한 팀이다.
"그리고 전국대회 본선 경기는 8월 28일 응봉체육공원에서 이뤄진다."
'뭐??? 8월 28일' 잠자코 듣고 있던 은정이는 내심 굉장히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표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8월 28일....'
“세상에, 우리 딸이 이게 무슨 일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벌써부터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하는 거야?”
민아 엄마가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 민아를 보고 놀라서 말한다.
“원래 엄마 딸 부지런 한 소녀인 거 몰랐어? 애들이랑 7시 30분까지 분수대에서 만나기로 했어. 빨리 가야지.”
민아가 운동화를 고쳐 신으면서 당차게 엄마에게 말한다.
“아니 근데, 그 뭐냐 원반 던지기냐 플라잉디스크? 그게 그렇게 재미있니? 요즘 보니까 다른 여자애들도 밤늦게까지 놀이터 근처에서 주고받던데.” 민아 엄마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아, 그거 은정이랑 우림인가 보다. 걔네 주말마다 플라잉디스크 밤 10시까지 하다가 들어간다던데. 나도 아침에 일찍 나가서 연습해야 돼. A조 들어가야지.” 민아가 엄마의 말에 대답하며 현관문을 젖힌다.
“그래서 너는 무슨 조인데?” 엄마가 물어보기 무섭게 민아가 문을 쾅 닫으며 엘리베이터에 쏙 올라탄다.
‘무슨 조이긴... C조인데...’ 민아는 엘리베이터 거울을 바라보며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8시 10분까지 모이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또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 거야? 그냥 기권할까?”
윤표쌤은 대회 일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오는 학생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정색하고 혼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매일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윤표쌤의 그런 스타일을 플라잉디스크부 아이들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른바 ‘형님 리더십’을 구사하는 윤표쌤이었지만 오히려 그 스타일이 편해서인지 훈련에 늦는 학생들이 요즘 들어 부쩍 많아졌다.
“오늘 가만 보니까 A조가 3명이나 늦었네. B조는 방송반 행사 때문에 2명 빠졌고... C조는 다 나왔네?”
윤표쌤이 깜짝 놀라며 C조 친구들끼리 연습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가만 보니 멤버 7명 중에 5명이 전부 6학년 1반 학생들이었다.
‘역시 학년부장님 반이라 그런지 기본 질서가 확실히 잘 잡혀 있네. C조 엔트리가 어떻게 되더라. 권세아, 김민하, 조민아, 장다언, 오은서, 임주희... 크으. 아직도 피벗, 포핸드 등 기본 기술이 갖춰져 있지 않아.’
그때 마침 윤표쌤의 핸드폰이 울렸다. 플라잉디스크 부 밴드에 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이었다. 확인해 보니 A조 단비였다.
“선생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러는데 셔도 되나요?” 단비의 메시지에서 진심이 느껴지긴 했지만 평소 지각이 잦았던 터라 윤표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비아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얘들아 오늘 단비가 몸이 아파서 셔도 되냐고 한다. 셔야지 그럼. 음? Can I sour today?. O.K. You can sour and sweet today.라고 답장을 할까 내가? 아오 그냥 진짜 그만 두든지 해야지. 내가 진짜...”
“야 윤표쌤 꼬장 또 시작되었다.”
멀리서 윤표쌤이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은이가 은정이에게 말했다.
“근데 윤표쌤이 화날만해. 사람 모자라서 안 그래도 지금 게임해야 되는데 못하고 있잖아.” 은정이가 피벗을 혼자 연습하며 하은이 말에 대꾸했다.
“우리 성실하고 제시간에 오는 예쁜 C조 모여보세요. C조는 일단 선생님이 던져주는 디스크 한 번 잡아보는 훈련 해보자.” 윤표쌤이 방금까지 화를 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화한 얼굴로 C조와 패턴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참 진짜 윤표쌤은 금방 욱했다 금방 식고. 뼛속까지 한국인이야. 그렇지 않아?” 우림이가 한숨을 쉬며 윤표쌤을 안타깝다는 눈초리로 바라본다. “어찌 보면 우리 반 남자애들이랑 똑같은 거 같아.”
“쌤. 오늘은 영어 보충 안 하고 플디 하면 안 돼요?” 다언이와 은서가 윤표쌤 교실에서 연필을 빙빙 돌린 채 영어 노트만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아침마다 플라잉디스크 훈련 할 때 열심히 하면 되지. 지금은 영어 보충 시간 아니냐. 그리고 너희 다른 과목은 몰라도 영어는 꼭 해야 돼.” 윤표쌤이 혀를 끌끌 차며 단어가 적힌 학습지를 다언이와 은서에게 나눠주며 말한다.
“아, 제발요. 오늘은 진짜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놀고 싶단 말이에요.” 다언이와 은서가 가방 속에서 플라잉디스크를 꺼내며 보채기 시작한다.
“하아... 너희 그럼 오늘 단어 3번만 쓰고 끝내려 했는데 다음 주까지 5번 쓰고 검사 맡을 수 있어?”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윤표쌤이 말하자 은서와 다언이는 쾌재를 부르며 ‘네’라고 말했다.
“5분 안에 1층 필로티로 내려와. 선생님 여기 정리만 하고 내려갈게.” 문을 박차고 다언이가 은서가 플라잉디스크 연습을 하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윤표쌤은 내심 흐뭇했다.
‘모든 선수의 에이스화. 어찌 보면 가능할지도...?’
“그러면 안 된다니까. 아니 은서야, 네가 다언이 뒤에서 패스를 달라고 하면 내가 줄 수가 없지. 움직여야지.”
“키가 작은 선수 앞에선 해머 기술을 이용해서 짧게 주라고. 길게 주면 수비한테 다 막혀.”
윤표쌤은 다언이와 은서랑 서로 공격과 수비에 필요한 것들을 연습하면서 끊임없이 피드백을 제공했다.
“쌤. 저희도 할래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6학년 1반 민하, 민아, 주희, 세아가 4층 연결통로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얼른 내려와 봐. 3:3 미니 게임으로 훈련 좀 하게.”
윤표쌤이 말하자마자 4명의 친구들이 쪼르르 내려와 연습에 합류했다.
‘김민하는 공간 창출이 부족한 대신에 키가 크고 이타적이야. 임주희는 돌아 들어가는 능력이 우수한데 적극성이 부족해. 권세아는 게임 흐름을 잘 읽어서 가로채기 능력이 아주 탁월한데 체력이 약해. 조민아. 응...? 조민아가 왜 C조에 있지?’ 윤표쌤은 학생들의 연습 장면을 훑어보다 문득 민아의 플레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플레이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공격, 수비 어느 곳이든지 민아가 안 보이는 곳이 없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 폭을 자랑했다. 지구력만 강한 줄 알았더니 순간 가속이 두드러질 정도로 빠른 민아의 모습을 보고 윤표쌤은 생각했다.
‘어쩌면 C조에서 몇 명 A조 스타팅 멤버나 특급 조커로 기용해도 될 것 같다. 진작 알아봤으면 좋았을걸.’
“쌤. 저 쌤한테 할 말 있어요.”
“할 말은 어제도 하고 그저께도 하신 것 같은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이리 진지하십니까. 주인님 아니 주은님?”
주은이의 굳은 표정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B조와 C조의 연습경기를 보면서 윤표쌤이 대답했다.
“어제 은정이랑 효주랑 아무튼 A조 아이들이랑 놀이터에서 연습했거든요. 근데 제가 엔드존 앞에서 자꾸 놓쳐서 애들이 되게 뭐라 했단 말이에요. 저도 잘하고 싶은데 미안해서....”
“나이스 캐치! 야. 김해린이. 그래 그렇게 수비가 눈치 못 채게 쓱 들어가서 공간을 만들라고. 그래서 어쨌다고?”
“그런데 지난주에는 은정이랑 하은이랑 우림이랑 위로도 해주고 그랬는데 어제는 진짜 제가 실수했는 데 아무도 저한테 뭐라고 안 하는 거예요.”
“그럼 별 문제없는 거 아니야. 아무 말 안 했으면?” 윤표쌤이 팔짱을 낀 채로 사이드라인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B조의 플레이에 집중했다.
“아니죠. 그럴 때는 차라리 저한테 뭐라 했어야 저도 마음이 풀리죠. 그래서 어제 이후로 계속 아이들이 저 볼 때마다 욕하는 거 같고...”
“아니 패스할 때 콜 하면서 하라고. 왜 쉬운 길이 있는데 어려운 길로 돌아가냐고. 찬스가 있으면 살려야 돼. 이제는. 그래서 또 따돌림받는 기분이 들고 그랬어?”
“선생님만 알고 계셔야 돼요.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저 A조 계속하고 싶단 말이에요.” 주은이가 윤표쌤에게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
“알았어. 자 다음 A조랑 C조 10분 게임하고 마무리하자. 라인업 해서 엔드존에서 대기해 봐.” 윤표쌤은 주은이를 돌려보낸 뒤 A조를 쓱 훑어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A조 너희 C조 5점 차로 못 이기면 알아서 해라.
이것들이 툭하면 자꾸 볼멘 소리나 해 대고.
팀 분위기는 C조가 훨씬 나아.’
“풀!!” 윤표쌤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A조의 은정이가 플라잉디스크를 멀리 뿌렸고 그렇게 A조와 C조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A조는 B조와 C조에게 한 번도 진 적이 없고 개개인의 기량이 좋아 득점도 많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게임 도중 팀원들끼리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졌고 후방에서 패스를 뿌리던 은정이와 우림이, 하은이가 전방으로 나와 득점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패스를 제대로 주는 선수가 없다 보니 A조의 공격은 계속 끊기기 일쑤였다. 게다가 전방에 멀리 나가 있다 보니 수비 가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급기야는 체력이 떨어져 걸어 다니는 모습까지 속출했다.
“A조 너희 오늘 너무 욕심낸다. 왜 유서윤, 안효주가 뛰어들어가는 데 패스를 안주냐고. 콜도 안 하고.”
윤표쌤은 A조의 플레이를 지나 칠정도로 타박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A조의 경기력은 더욱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너희 오늘 한 번 깨지는 것도 낫겠다.’ 윤표쌤은 일부러 A조의 플레이가 잘못될수록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늘 이길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A조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그렇지. 세아야. 커트 잘했다. 은서야 바로 뿌려라.”
윤표선생님의 지시에 은서가 지체 없이 디스크를 A조의 엔드존에 날렸다. 그러나 급하게 날리다 보니 상대편 엔드존에 다소 깊숙한 곳으로 디스크가 날아갔다. 아무도 잡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찰나, 좌측 사이드라인 한 구석에서 총알 같은 스피드로 뛰어가는 이가 있었다. 민아였다. 순간 가속도를 바탕으로 디스크 하나만 보고 죽어라 뛰어가던 민아는 극적으로 디스크를 잡았다. C조의 득점이었다. 그렇게 C조는 A조를 1:0으로 꺾었고 C조 친구들은 전부 뛰어나와 얼싸안고 기뻐했다.
“자. 일단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내일 또 얘기하자. 1교시 늦겠다.”
윤표쌤은 아이들을 부리나케 교실로 올려 보냈고 운동장에 세팅해 둔 콘을 정리했다. 문득 은정이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망울을 하며 지나갔고 나머지 친구들도 전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일은 A조 친구들을 잘 달래 가며 문제점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몇 분 전 민아의 플레이를 다시 떠올렸다.
‘와. 조민아. 그거 어떻게 잡았지.
어쩌면 대형사고 한 번 치겠는데. 와 진짜 나만 보기 아쉬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