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네 남자애들 다 저리 가라고.” 손목 부상으로 스탠드에 앉아 있던 도연이가 남자아이들을 향해 소리친다.
“와, 여자 애들. 던지고 가만히 서 있는 거 봐. 저렇게 안 움직이면 어떻게 패스하라는 거야.”
“야. 김민준. 너희 남자들끼리 훈련하고 여자 아이들 연습하는 건 신경 끄라고.” 도연이가 벌떡 일어나 남학생들이 훈수 두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말한다.
“왜 이렇게 소란이야. 남학생들은 훈련 끝났으면 여학생들 연습 구경하지 말고 교실로 들어가.”
윤표쌤이 도연이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 남학생들을 교실로 돌려세웠다. 1교시 수업 시작 10분 전. 연습을 마치고 여학생들을 불러 모은 뒤 윤표쌤이 말한다.
“내일 아침 훈련은 남학생들 대회 참가 준비 때문에 하루 쉰다. 폭염 때문에 경기 일정이 다소 조정되었어.”
윤표쌤이 훈련에 사용한 디스크와 삼각콘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여학생들을 쓱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쌤이 매일 같이 계속 강조하는 것 중 하나인데. 패스할 곳을 얘기하고 패스하고 받았으면 다른 빈 공간으로 움직여줘야 해. 멍하니 서 있는 사람한테는 절대 기회가 안 온다. 그걸 놓치면 바로 실점 위기로 이어지는 거야. 종료 휘슬 울릴 때까지 계속 집중해야 돼. 알았니.”
“네!” 여학생들은 일제히 크게 대답한다.
“저... 선생님.” 은정이가 손을 들고 윤표쌤에게 질문한다. “남자애들 시합하는 거 저희도 따라가서 보면 안 되나요?”
은정이가 묻자 윤표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작년에 여학생들 몇 명 남학생 시합 보러 따라왔다가 부모님이랑 상의도 없이 온 거라서 아주 학을 떼었던 거 몰라? 이번엔 선생님만 따로 갔다 올게. 경기 결과는 바로 알려주고.”
“네...” 은정이는 질문을 더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교실로 올라갔다.
“와. 근데 이번에 남자애들 올라가면 3 연속 서울시 대표네. 실력도 역대급이라니까 우승하겠지?” 우림이가 부럽다는 듯이 말한다.
“그런데 만날 윤표쌤이 그러셨잖아. 남학생들 보면 너무 업 되어 있다고. 잘난척하다가 큰코다칠지도 몰라.” 하은이가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맞장구친다.
“남자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우린 우리 것만 신경 쓰면 된다고 하셨어 윤표쌤이.” 은정이가 머리를 다시 풀러 머리를 묶으러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문 앞에서 멈칫한다. 화장실에서 밖으로 나오던 주은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대수롭지 않다 생각하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은정이를 주은이가 부른다.
“야, 유은정. 나 포핸드 하는 거 가르쳐줘. 백 번 던지면 백 번 다 성공할 수 있게. 흑흑흑.” 은정이 앞에서 주은이가 갑자기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아니 알려주는 것은 상관없는데. 그게 울 일은 아니잖아. 알았어 일단 진정해 봐.” 은정이가 주은이를 달래는데 하은이가 옆에서 크게 놀라며 말한다.
“어머. 야 이주은 너 코피.” 하은이와 우림이, 은정은 급히 주은이를 부축해 보건실로 향했다. 보건선생님은 자초지종을 들은 뒤 주은이를 침대에 눕힌 후 안정을 취하게 했다.
“너희들은 교실로 올라가도 돼. 들어보니까 주은이가 요즘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잤다고 하더라고. 뭔가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았나 봐. 주은이 담임선생님께는 내가 연락할게. 너희 아니었으면 더 크게 아팠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야.”
은정, 하은, 우림이 셋은 보건실을 나오며 서로를 향해 동시에 외쳤다.
“주말에 연습 고?” 셋은 O.K를 외치며 휴대폰을 꺼내 단체 채팅방에 공지했다.
“이번주말에 중앙공원 3시부터 플디 할 사람. 칼답 바람 무시 노노해.”
“뭐? 남자애들이 3위를 했다고?” 은서가 눈이 왕방울만 해진 채로 크게 말한다.
“응. 오늘 등교할 때 남자애들 완전 풀이 죽었잖아. 그랬는데 곡현초에 키가 180cm인 남자애가 있는 데 걔가 엄청 잘했대. 아무도 못 막았나 봐. ” 지우가 자기도 굉장히 놀랐다는 듯이 은서에게 말했다.
“아니, 곡현초한테만 졌으면 적어도 2등은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은서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다언이가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말한다.
“곡현한테는 완전 큰 점수 차이로 지고 나서 다음 경기 완전 말렸대. 그래서 당연히 이길 수 있는 팀한테도 1:1로 비겼다고 그러더라고.” 지우가 마치 스포츠뉴스를 전하듯이 경기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는 말투로 말했다.
“하아....” 같이 걸어가던 주은이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쉰다.
“주은아 너 왜 그래? 어... 갑자기 왜 울어?” 주은이 곁에 있던 친구들은 일제히 당황하며 주은이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아니야. 갑자기 안 좋은 생각이 떠올라가지고. 나 먼저 올라갈게. 학교 끝나고 봐” 주은이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을 애써 참으며 교실로 뛰어올라갔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수록 눈물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마음이 아픈 것보다 매일 밤 떠올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한 남학생이 좌절하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에서 져서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얼마든지 내가 대신 슬퍼하고 울어줄 수 있을 텐데. 너만 돌아와 주면.’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주말에 너희끼리 연습 잘했어. 주은이는 좀 괜찮아졌고?” 윤표쌤이 영어실에 찾아온 은정이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네. 결국엔 이제 남은 건 여학생 밖에 없다고. 여자들이 더 열심히 하자고 얘기했어요. 제가 단체 채팅으로 연습할 사람 모았는데 10명 넘게 모여서 저희들끼리 게임도 했어요.” 은정이가 눈에 힘을 주며 윤표쌤에게 말한다.
“키야. 기가 막힌데. 어쩌면 너희가 이번에 역사를 쓸지도 모르겠어. 자발적으로 연습하면서 서로 친구들끼리 위로도 해주고. 그게 바로 스포츠 맨쉽이야. 그러면서 너희들도 성장하는 거고.”
“그런데... 작은오빠랑도 축구 얘기하면서 느낀 건데...” 은정이가 고민거리가 있다는 듯 말한다.
“작은오빠가 왜 너희는 패스하고 움직이지 않냐고 얘기하거든요. 근데 진짜 남자 선수들은 말하지 않아도 2:1 패스 같은 거 한단 말이에요. 저는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겠는데 애들이 안 움직여요.”
“그게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은 신체적 차이인 것 같아. 그것은 꾸준한 경기를 통해서 서로 얘기하고 소통하면서 극복하는 수밖에 없어.” 선생님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것을 멈추며 화면을 하나 띄워서 보여준다.
“이젠 대회가 코앞이기 때문에 이 멤버로 가야 할 것 같아.”
‘응... 이것은?’
“다음 주 선발은 A조 위주로 가고. 약한 팀이랑 할 때는 B조, C조 선수들을 고르게 출전시킬 생각이야. 주장인 네가 보기에는 어때?”
“음.... 이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이주은이랑 구민서가 좀 애매하지 않나요? 선발로 나서기에?” 은정이가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그 애매함이 깨질 수도 있지.” 윤표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스포츠에는 만약이란 없으니까.”
“야 이주은 너 일로 나와봐” 은정이가 쉬는 시간에 주은이의 교실로 찾아갔다.
“나 실은 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주말에 같이 연습해 보니까 너랑 같이 대회 나가는 거 잘 해내고 싶어.”
은정이가 속마음을 털어놓자 주은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 좀 그만 좀 울지? 나는 지금까지 나 좋다고 하는 남자애 하나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아직 없어. 그래서 네가 솔직히 부러운 게 있어. 너는 나보다 사랑이 뭔지 더 알잖아.” 은정이가 주은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한다.
“근데 뭐 네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네가 이렇게 질질 짜고 있는 거 그 남자애도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아. 뭐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분명 그럴 거 같아. 그러니까 나랑 함께 연습해.”
“흑흑 알았어. 고마워. 나도 그동안 너한테 말 못 했는데 네가 플라잉디스크 잘하는 게 부러웠어. 나 좀 잘 가르쳐줘.”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나 갈게.” 은정이가 멋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교실로 향한다.
“네가 나에게 한없이
따뜻한 계절이었다면
이제 그걸로 충분해.
이젠 내가 뜨거워질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