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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지다니

새로운 '유니버스'를 꿈꾸는 대기업이 동네 마트에게 자리를 내주다

by 홍윤표

우리 동네에 마트가 2개 있다. 하나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매일매일 24'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동네 어귀에 하나 정도 있을 법한 'ㅇ마트'이다. 생필품을 비롯한 공산품을 한두 개 간단하게 사기에는 전자의 마트가 좋고 과일, 채소 등의 농산물은 후자의 마트가 좋다. 그래서 주말에 시간을 내어 각종 식자재를 'ㅇ마트'에서 많이 사는 편이고 유통기한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라면 등의 공산품을 그때그때 '매일매일 24'에서 구매하는 편이다.

그러나 요즘 같이 더운 날 육아대디에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맥주'이다. 오늘 밤도 아기들을 모두 재운 10시 무렵,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일매일 24' 마트로 향한다. 그 이유는 500ml에 1,160원 밖에 안 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발포주를 구매하기 위해서이다. 어느 마트를 가도 맥주값은 거기서 거기이며 국산, 수입을 막론하고 대부분 500ml에 2,500원을 상회한다. 술은 마셔야겠고 돈은 적게 쓰고 싶은 나에겐 '기분이 좋아지는' 발포주가 최고의 선택이다. 그리고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수많은 맥주를 제치고 맛있는 맥주 '2위'에 선정된 바가 있는 제품이기에 믿고 마실 수 있다. 확실히 좋아하는 술을 이야기하다 보니 글이 술술 써진다. 이래서 내가 술을 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따라 마트의 진열장이 그야말로 휑하다. 사열하는 군인들처럼 입구부터 진열장 곳곳을 가득 메워져야 할 제품들이 보이지 않는다. 과자, 라면 코너는 아예 진열장 자체가 텅텅 비어있는 채로 있다. 무슨 일인지 직원 분께 넌지시 물어보니 2주 뒤면 마트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세상에 그럼 바로 옆에 있는 동네 마트에게 대기업의 절대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있는 '매일매일 24'가 밀린 것이라는 거네?

그럼 내 발포주는? 'O마트에는 코끼리가 그려진 발포주 밖에 팔지 않고 그건 홉 맛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먹기 싫은데?' 늘 술 마실 궁리만 하고 있다 보니 초점은 오로지 술에만 팔려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트 물건 곳곳에 각종 할인행사를 알리는 태그가 붙어있다. 다른 제품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비싸서 구매하기 힘든 제품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미국의 유명한 아이스크림 제조사의 제품이 40% 할인을 받아 국내 제품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다. 무슨 맛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3~4개를 장바구니에 담아 확보했다. 그리고 냉동 코너로 이동했다. 제품 하나당 8,000 ~ 10,000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엄 식품들이 즐비하다. 모두 할인 행사라는 태그를 지닌 채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그 유혹에 못 이기는 척 처음 들어보는 냉동식품을 주섬주섬 집어 장바구니에 넣는다. 주로 1~2개만 남아있는 제품을 우선적으로 집어보았다. 왜냐하면 달랑 1~2개만 남아있다는 말은 인기가 많다는 척도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렇게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나서 계산대에 올려놓고 물건들의 값을 책정해 보았다. 8만 원가량을 구매했는데 에누리 금액만 자그마치 3만 원 이상이 되었다. 와이프가 꼭 사달라 했던 과일치즈나 아이들 먹일 우유를 제했다면 에누리 확률은 거의 50%가량 되었을 것이다. 평소에 접하기 힘든 에누리율을 받아보았기에 나름 합리적으로 소비한 '지혜로운 소비자'라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 평소 같았으면 500ml 발포주 2개로 2,320원을 소비하고 끝냈을 것인데 말이다.

정용진 부사장을 필두로 새로운 '유니버스'를 구축하고 있는 파격적 행보는 우리 동네 주민들을 어필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휴직 중인 와이프의 말에 따르면 평일 오전 이른 시간부터 'ㅇ마트'는 동네 어르신들로 가득하단다. 청과, 생선 및 육류 코너의 물품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분석한 후 그것도 모자라 몇 번을 장바구니에 넣고 빼기를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지갑을 여시는 어르신들. 그들이 바로 이 동네 마트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동네 상권 배틀에서 패한 '매일매일 24'는 조만간 또 다른 마트로 바뀐다고 한다. 과연 2라운드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매력을 발산할 것인지 기대가 되는 밤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발포주는 꼭 발주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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