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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Aug 23. 2020

갈아서 먹는 사과는 맛이 없답니다.

나는 아직도 위로가 필요하다

 외갓집은 아궁이로 불을 땠다. 바닥 장판에는 군데군데 탄 자국이 있었다. 바깥이 아무리 매섭게 추운 날이어도 안방은 절절 끓을 정도로 따뜻했다. 우리는 이불 아래로  파고들어 따뜻함과 뜨거움 사이의 온도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 엉덩이가 너무 뜨거우면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꿔주었다.


 외할머니는 사과를 강판에 갈고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사과를 갈아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외갓집은 과수원 농사를 크게 했다. 외할머니는 강판에 사과를 올려놓고 조심스레 갈기 시작했다. 커다란 그릇에 사과즙이 똑똑 떨어졌다. 사과 향이 어찌나 달큼한지 우리는 모두 숨죽이고 사과즙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준수가 "내가 제일 먼저 먹을 거야"라고 했다. 나는 11살이고 준수는 9살이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나보다 2살이나 어린 녀석이 먼저 사과즙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다니 어이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우리 친손주, 우리 친손주"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니까 이 녀석이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11살이야. 어디서 까불고 있어. 누나가 다 먹거든 기다렸다가 먹어라." 이렇게 말했다.


  외할머니는 오래된 스덴그릇을 갖고 있었다. 그 그릇에 사과즙을 부어 주면 한 명이 다 마시고 다음 사람이 마시는 식이었다. 사과즙이 완성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나에게 사과즙을 내밀었을 때 나는 할머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내민 그릇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분명 단내가 폴폴 나는 사과였는데 갈아 버린 사과는 맛이 없었다. 나는 그날 밤 내내 잘못한 아이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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