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산타를 믿지 않았다.
한 번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걸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동생들도 산타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본 적도 없었고 산타복을 입은 할아버지를 본 적도 없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철이 일찍 드는 법이고 양말을 걸어놓고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은 어딘가 바보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텔레비전에는 산타할아버지가 나와서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린 나는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내가 12살이 되었을 때 막내는 5살이었다. 막내는 새마을 유아원을 다니는 작은 꼬마였다. 막내에게는 산타의 존재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나와 둘째, 셋째가 머리를 맞대고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만들었다. 다 모아보니 이천 원쯤 모였다. 그 돈도 어린 우리들에게는 큰돈이었지만 막내가 좋아할 선물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걸 찾아보니 양말이나 장갑은 가능해 보였다. 우리는 재래시장 입구에 있는 잡화점으로 갔다. 가게 입구에는 할머니들이 신는 덧버선이나 몸빼 같은 걸 진열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장갑을 골랐다. 빨간색과 초록색이 섞인 벙어리장갑이 있었다. 우리는 그 장갑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서 동생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막내는 일찍 잠이 들었고 우리는 막내 머리맡에 그 장갑을 놓았다. 놓고 나서도 위치를 몇 번은 바꿨던 것 같다. 막내가 일어나서 눈을 뜨자마자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날 밤은 유난히 길었다. 우리는 막내가 언제쯤 깨어날지 긴장했고 막내의 반응이 어떨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막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선물을 발견했다. 선물 포장지를 뜯고 장갑을 발견하더니 얼른 손에 끼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 날 막내를 제외한 우리 셋은 역시나 산타에게 아무런 선물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가장 행복했던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동생 S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동생 S는 아이들이 참 신기하다고 말했다.
" 언니, 우리 집 애들은 참 순진해. 다른 집 애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산타할아버지 없다고 한다는데 우리 집 애들 아직도 산타를 믿거든. 지금도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
S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이들이 커서 " 엄마, 산타할아버지 없는 거 다 알아요. 엄마, 아빠가 산타할아버지 흉내 낸 거잖아요"라고 하면 부모들은 힘이 빠지고 실망한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천진한 아이가 어느샌가 너무 커버린 것 같은 섭섭함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 아이가 그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아이들의 세상에서 나와 버린 것 같은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조카들은 퍽 순진했던 모양이다. 키는 다른 친구들보다 한 뼘이나 커서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조카들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 크리스마스에 문제가 생겼다. S가 조카들의 선물을 주문했는데 아마 해외 직구로 상품을 주문한 모양이다. 딸아이의 선물은 날짜에 맞게 도착했는데 아들 선물이 도착을 못한 모양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선물을 받지 못한 아들이 계속 울어대자 S도 어지간히 당황했다. S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지겠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전화를 걸었다. 울던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엄마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는 눈치였다.
" 산타 할아버지, 왜 선물이 안 왔나요? "
"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이번에 착한 아이들이 많아서 배달이 많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걱정을 했죠. 그럼 우리 아이가 선물을 못 받는 건 아니고 조금 늦게 받는 거네요. "
S는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시작했다. 워낙 S는 상황 대처 능력도 뛰어나고 말도 잘하고 코믹한 요소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러니 그 상황을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아마 S는 정말로 산타 할아버지에게 상황을 확인하는 것처럼 생동감 있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했을 것이다. S가 전화를 끊고 아이 쪽을 바라보자 아이가 한 마디 던졌다.
" 엄마, 그러니까 주문을 미리미리 해야지. 이렇게 늦게 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랬다.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얘기했다가는 혹시라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는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고 있는 순진한 아이의 역할을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S는 그토록 산타할아버지와 거짓 통화 연기를 실감 나게 했으니 아이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S는 나중에 그 일을 얘기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 언니, 그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위야. 이제까지 내가 그 녀석을 속인 게 아니라 그 녀석이 나를 속인 거더라고"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K의 일화도 재미있다. K의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산타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선물을 전달하려고 하니 몰래 선물을 보내달라고 했다. K는 마트에 가서 대형 인형을 사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아이 눈에 띄지 않는 창고방에 몰래 선물을 숨겨 놓았다가 어린이집에 전달했다. 며칠 뒤 산타 행사가 있는 날, 아이는 커다란 인형을 안고 신이 나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K 씨는 행복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아이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훔쳐갔어요. 내가 우리 집에서 이 선물을 봤는데 다음 날 없어졌거든요. 그런데 오늘 산타할아버지가 어린이집에 와서 이걸 주고 갔어요. "
K는 너무 당황해서 그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아이는 언제 그 선물을 보았을까. 졸지에 도둑이 되어 버린 산타 할아버지를 어떻게 변호해야 할지 마땅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아 K는 진땀을 뺐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선물을 치밀하게 잘 숨겨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나와 S, K까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어여쁜 동심의 세계를 지켜주는 것,
그리고 순수한 갈망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마법의 세계에 아이들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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