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점짜리 시험지에 슬퍼하지 않는 방법

by 느리게 걷기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검은 롱 패딩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기 때문에 아들의 등장은 마치 롱 패딩이 혼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은 언제나처럼 운동화를 신지 않고 하얀색 실내화를 신고 있다. 코 옆에 난 여드름과 락커처럼 기르고 있는 지저분한 머리가 더욱 덥수룩해 보인다. 아들이 거실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곁으로 다가갔다.

" 아들, 오늘 시험 잘 봤니?"

" 평소하고 똑같죠 뭐"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보다 더욱 집요한 기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 그래서 몇 점인데?"

아들은 나를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 웃는다는 것은 잘 봤다는 의미인가?' 아주 잠깐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들은 곧 고개를 떨구었다.

" 기대하지 마세요. 저 오늘 30점 받았어요"

아들은 이내 점수를 실토했다.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엄마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대를 단숨에 꺾어 버리고 찬물을 끼얹어 버리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인가. 설마 아들의 점수가 수직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인가. 나는 그야말로 기운이 쑥 빠져 버렸다. 아들을 향한 나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에 비난의 어조를 띄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 너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차마 그런 말들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들을 한마디도 꺼내기 힘들 정도로 나는 정말로 실망하고 낙담했기 때문이다.


낮에 동생이 찾아왔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시골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는 조카의 특목고 합격 여부를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이었고 동생은 담담한 목소리로 합격했다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놀라고 흥분한 눈치였다. ' 세상에. 연락이 없기에 안 된 줄 알았는데 정말 대견하구나 '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 섞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이 지금 언니 집에 와 있다고 하자 엄마는 당황한 것 같았다. 나중에 통화를 하기로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두 사람은 나 때문에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내가 혹시라도 속상해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나의 아들이 전혀 공부를 하지 않고 있고 속을 끓이고 있는 내 사정을 알고 있는 가족들은 이번 일에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고 나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조카의 소식을 듣고 나는 누구보다 기뻤다. 어른스럽고 똑똑한 아이였다. 조카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부러운 감정들이 밀려왔고 나의 처지가 새삼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는데 아들을 키우면서 여러 차례 좌절을 맛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점수와 석차를 경험하기도 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위안을 하면서도 한 번씩 그 점수를 보고 있으면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아들은 처음으로 시험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문제집도 풀고 했는데 오랫동안 놓아버린 공부에 대한 감각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스로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 어디인가.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고 애써 위로를 해봤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인 위로였다. 오늘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 30점짜리 시험지를 가지고 들어오다니. 나는 마치 나의 인생이 30점짜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30점이라는 점수를 맞을 수 있는 걸까? 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고 아무렇게나 답을 찍어도 그 정도 점수는 그냥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를 닮은 걸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공부에 취미가 없는 남편을 닮은 것인가. 나의 상상은 가지를 치기 시작했고 결국 원망의 종착지는 아이에게 절반의 유전자를 나눠준 남편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남편으로 결론 내리고 부글부글하고 있을 때 당사자가 집에 도착했다. 커다란 등산배낭을 메고 있는 이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오늘 하루 종일 산을 오르고 난 뒤라 지쳐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상쾌해 보였다. 남편은 산 아래 포장마차에서 5천 원짜리 수제비와 4천 원짜리 막걸리를 먹었는데 추운 날씨에 시원한 막걸리와 뜨끈한 수제비가 최고였다고 찬사를 쏟아냈다. 그렇게 만원도 되지 않는 돈으로 마음껏 행복을 누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잔뜩 행복하고 느긋한 남자에게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아들의 아버지니까 알려야 했다. 나는 남편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담담한 어조로 아들의 성적을 말했다. 남편은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술이란 것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사람을 이토록 여유 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처럼 땀을 잔뜩 쏟고 술까지 걸치고 온 남편은 그 정도 일에는 놀라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이어서 남편에게 조카의 소식도 이야기했다. 그 학교가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운지 알고 있는 남편은 놀라면서 기뻐했다. 방에 들어가 있던 아들이 시끌벅적한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아들에게도 사촌동생의 소식을 전했다. 아들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 와. 대단하네요. 그 학교 들어가기 정말 힘든데. 제 친구 H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데도 떨어졌거든요. "

아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어느새 자신의 시험 성적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접시에 군것질거리를 주섬주섬 챙겨서 아들은 방으로 들어간다. 아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으니 남편이 한 마디 던졌다.

"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다니 정말 대단한 인성을 가진 아이군"

내가 콧방귀를 뀌자 남편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저렇게 잘생긴 기타리스트 본 적 있어?"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더니 남편의 눈에 30점짜리 아들은 잘생긴 기타리스트인 모양이었다.


취기가 잔뜩 오른 남편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종일관 싱글벙글했다. 하긴 이럴 때는 같이 속을 끓이며 비관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것보다 태평스러운 말 한마디가 훨씬 도움이 되는 법이다. 태평스럽게 앉아 있는 남편을 보고 있으니 내 기분도 제법 괜찮아졌다.


그래. 내일쯤에는 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아들에게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야겠다.

" 나의 눈에만 잘 생긴 기타리스트여.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너의 시험지가 30점이라고 너의 인생이 30점은 아니다. 그러니 그 점수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 "


( 그런데 아들, 아무리 생각해도 30점은 너무 한 거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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