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써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의 자리는 강의실 앞쪽 중간이었다.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코파기는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보 얼굴 만들기였다. 그는 두 손으로 눈 아래에 있는 피부를 아래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입은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벌리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눈 아래 피부를 당기며 양쪽 볼에 얹혀 있었다. 앞에서 보면 그는 바보 흉내를 내고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는 5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팀장이었다. 그는 전혀 귀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을 이리저리 비틀며 이상한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외면했다. 그는 앞에 서 있는 나를 웃게 만들려고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강의가 지루해서 그런 유치한 장난으로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특이한 행동을 자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여름에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 그러다 자리에 앉아서 발가락을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슬리퍼 위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의 발톱을 볼 때마다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회의를 할 때도 이상한 행동을 했다. 볼펜을 만지작거리다가 그 볼펜을 코에 쑤셔 넣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그런 행동을 본인이 순수하고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증거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S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는 얘기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아내는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50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출신 대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것은 그의 말버릇에 자주 나타나곤 했다. 그는 회사에서 S대학 출신들의 임원 얘기가 나오면 꼭 아는 체를 했다. 자신도 그 학교를 나왔다거나 그 임원이 자신의 후배라거나 그런 식으로 자신의 출신 대학에 대한 얘기를 슬쩍 끼워 넣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가 30년 정도 되었을 텐데 대학에 대한 자부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격의 없는 팀장이 되려고 노력했다. 직원들 앞에서 격의 없이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는 것을 주특기로 했다. 그의 농담은 대부분 썰렁하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농담을 개발했다. 그러나 그의 농담은 대부분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팀에 사람을 모집할 때도 " 우리 팀에는 발로 마우스만 움직일 수 있으면 누구나 환영입니다"라는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그의 농담은 그 팀에 지원하려고 하던 사람과 그 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시에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편이라서 그런 농담을 던진 후에 혼자 재미있어하며 오랫동안 자신의 농담을 곱씹곤 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다른 직원들이 하는 일이 그 정도로 단순하고 시시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곁에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직원들은 있었지만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오늘 하필이면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나의 강의를 이토록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돈도 안 되는 일이었다. 평소에 회사에서 사내 강의를 나가면 시간당 몇만 원의 강의료를 지급받게 된다. 그러나 내가 일하는 조직에서 하는 강의는 완전히 무료로 하는 강의였다. 상무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이 발단이었다. 상무님은 인재개발원에 가서 한 강의를 조직 내 직원을 대상으로 한번 하면 좋겠다고 말을 꺼냈고 나는 별생각 없이 수락을 해 버렸다. 그러나 강의를 하려면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나는 몇 달 동안 교안을 수정하고 참고 서적들을 읽으며 강의를 준비했다. 직원들 10여 명에게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강의 자료를 수정하기도 했다. 주말 내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이해가 안 간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강의는 나에게도 특별했다. 이제까지는 처음 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였지만 이번 강의는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고 그만큼 의미도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코를 파는 이 남자 덕분에 나는 김이 새 버렸다. 물론 그는 나의 강의를 어떤 측면에서는 열심히 들었다. 졸거나 딴짓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어 내는 그 팀장 때문에 나는 강의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강의가 끝난 후에 내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람들이 고생했다고 인사를 하며 자기들 자리로 돌아갔다. 그중에는 커피를 사다 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며 밖으로 달려 나가는 선배도 있었다. 그때였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고 카톡이 하나 들어왔다. 그런데 카톡은 단 한 줄이었다.
오자 교정: 격양. 아니고 격앙
카톡을 보낸 사람은 조금 전까지 코를 파고 이상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 팀장이었다. 나는 그 카톡이 무슨 의미인지 얼른 이해하지를 못했다. 나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잘못 보낸 메시지인가. 그리고 열심히 단서를 찾아 헤매던 나의 기억이 드디어 단서를 건져 올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중간에 띄운 슬라이드의 문장을 지적하는 카톡이었다. 나는 중간에 격양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문장을 화면에 띄웠던 것이다. 그는 왜 나에게 카톡을 보낸 것일까. 나는 멍해졌다. 그의 자리는 나의 자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옆으로 와서 한 마디 툭 던지고 가도 될 텐데 수고롭게 카톡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카톡에는 아무런 온기가 없었다. 보통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용건을 보내지 않는가. 아니면 강의하느라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같이 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무안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맹렬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강의 내내 앞에 있는 사람을 조롱하고 놀리는 행동을 계속하더니 강의가 끝나자마자 이런 짧고 무례한 카톡을 보내다니. 나는 그 팀장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맞춤법을 확인해야 했다. 정말로 내가 맞춤법을 틀린 것인지 맞게 사용한 것인지 확인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국립국어원 표준어 사전에서 아래 내용을 찾았다.
격양이 격앙을 잘못 쓴 단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두 단어는 맞고 틀림의 관계가 아닙니다. 두 단어 모두 표준국어사전에 올라가 있고 의미 또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도 격앙과 격양은 의미나 쓰임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는 의견입니다.
격양과 격앙은 둘 다 맞는 단어였다. 두 단어는 혼용해서 사용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의 지적은 틀린 것이었고 다행히 나의 문장은 맞는 문장이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 소파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100명 가까운 사람들을 강의실에 모아놓고 같은 내용의 강의를 했을 때 분위기와 반응이 모두 좋았다. 사람들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오늘 그 팀장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오히려 그때보다 교안은 훨씬 다듬어진 상태였고 열정적으로 강의를 했다. 물론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듣기는 했다. 그러나 그 팀장의 표정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기분 나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고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승리감에 빠진 듯한 그 짧은 카톡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내가 만든 것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잘 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내가 조금 더 차분해졌을 때 나는 무언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강당의 연단 위에 올라섰을 때 내 앞에 사람들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나의 조직에서 나는 새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성격이고 전공이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특히 팀장이나 직책자 입장에서 보면 나는 그저 한참 아래에 있는 직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아래 직원이 뭔가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시시한 일로 혹은 건방진 일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료를 찾고 착실하게 준비를 했던가. 그런 시간들을 돌이켜 보고 있노라니 나의 감정은 저절로 격양되었다. 나는 다음날 그 팀장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 사람의 자리로 가서 저에게 보낸 카톡이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을 짚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 둘 다 표준어이고 둘 다 맞는 표현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정정해 주리라 생각했다. 이왕이면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내가 팀장을 한방 먹이는 것을 구경할 것이고 심정적으로 동조해 준다면 나의 복수는 더 통쾌해질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어서 나는 팀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 팀장에게 맞춤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에게 사실을 정정해 주는 것이 별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와 똑같은, 혹은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앞으로도 격양과 격앙을 엄격하게 혹은 잘못 구분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나는 그 두 가지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말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