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더 정확하게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면 자동차 와이퍼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자동차 와이퍼는 분명 꺼져 있었다. 그러나 왼쪽 와이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집에서 차로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안경점이었다. 신호 한 번만 받으면 곧 도착할 거리였다. 도착해서 차를 주차시킬 때까지 남은 시간은 5분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남편이 그 미세한 소리와 떨림을 알아차릴 것인가. 승산은 있었다. 차 안에서는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의 소리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 정도 소음이라면 충분히 와이퍼의 소리를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역시 나와 다른 타입의 인간이었다. 남편은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의 근원에 집중했다. "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 무슨 소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러나 남편은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이건 와이퍼에서 나는 소리인데. 어, 와이퍼가 꺼져 있는데도 계속 끼긱거리면서 움직이네"
남편은 길에 차를 세웠다. 이럴 때는 상황판단이 중요하다. 평소 같으면 따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밖은 영하 20도 가까운 날씨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바로 남편을 따라 내렸다. 남편은 평소와 다른 나를 의심에 찬 눈으로 흘깃 바라보았다. 뭔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다.
남편은 와이퍼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와이퍼 주변에는 얼음이 잔뜩 얼어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차 위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 눈을 털어내지 않았으니 그 눈은 밤 사이 꽁꽁 얼어 버렸고 며칠이 지나도록 녹지 않은 채로 와이퍼 주변으로 거대한 물기둥 모양으로 얼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실 눈이 내린 다음 날 남편은 차를 두고 가라고 했다. 밤 사이 빙판으로 변해 버린 길을 보니 도무지 차를 운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버스가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곧바로 차가 주차된 곳으로 달려갔다. 차는 지붕과 양 옆으로 하얀 눈이 얼음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일단 시동을 켰다. 최대한 온도를 높여서 차 앞쪽에 얼음을 녹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얼음이 어찌나 두껍게 얼었는지 쉽게 녹지 않았다. 차에는 눈을 녹일 마땅한 장비 같은 것이 없었다. 나는 신용카드를 꺼내서 얼음을 제거하려고 했는데 신용카드가 구부러져 버렸다. 할 수 없이 나는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20분 가까이 지나자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음은 시원스럽게 녹을 기색은 아니었다. 아주 조금 균열이 생겨서 녹아내리려는 조짐만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회사에 가야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운전석에서 앞 뒤를 볼 수 있는 구멍만 만들어서 차를 출발시켰다.
이때 나는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 와이퍼를 움직여서 얼음을 어떻게든 털어보려는 것이었다. 와이퍼를 몇 번 작동해도 와이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와이퍼는 위아래가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어 버린 상태라서 그 정도 힘으로 움직일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무리한 동작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왼쪽 와이퍼가 혼자서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간격으로 끼긱하는 소리를 내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는 아주 심각한 일이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때로는 낙천적으로 상황을 해결하도록 돕지만 가끔은 어처구니없는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여간 나는 그런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날씨가 풀리면 저절로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편은 플라스틱 끌처럼 생긴 것을 가져와서 와이퍼 주변의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곁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남편이 하는 일을 도왔다. 남편은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 와이퍼가 이런 거 몰랐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웃음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남편의 표정은 시한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린다면 그것은 대참사일 것이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전혀 이런 증상이 없었는데"
남편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차를 탄 게 언제야?"
"금요일이지. 그 날 출근을 했으니까. 그날도 아무렇지 않았거든"
내 머릿속에는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덜덜거리며 괴상한 소리를 내던 와이퍼가 떠올랐다. 그러나 사실을 실토할 수 없었다. 나의 무신경한 행동에 대한 지적과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런 소리가 안 났어?"
"그때는 이렇게 큰 소리가 안 났지"
아.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냥 소리가 안 났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큰 소리가 안 났다고 말해 버렸다. 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을 것인가. 남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 큰 소리가 안 났다니, 그럼 소리가 나기는 했다는 거야?"
이때가 중요하다. 나는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인지할 정도로 소리가 났다면 알았을 거라는 얘기지, 금요일에 전혀 아무런 증상도 없었거든. "
남편은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나의 연기가 너무 완벽했기 때문일까.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 내일 정비소에 가 볼게. 요즘 한파라서 이런 일이 많은가 봐"
나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남편은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로 더 이상 추가적인 질문이나 추궁은 이어지지 않았고 주말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났다. 이 정도 거짓말에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전당포 노인을 죽이고 나서 수사망이 시시각각 좁혀 올 때 라스꼴리니코프는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을까. 그래서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 모양이다. 내일은 정비소로 가서 와이퍼를 손봐야겠다.
오늘 나의 범죄는 완전범죄로 끝이 났다. 이것은 모두 나의 천부적인 연기력과 표정연기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