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여행 중 유난히 컨디션이 좋은 날 말이다.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날 2만 보가 넘게 걸었는데 몸은 가벼웠다. 콜로세움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고 밖으로 나왔다.
먼저 일어난 남편이 간단한 아침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우리의 숙소는 에어비앤비였다.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인덕션이 있고 4인용 대리석 식탁이 주방에 있었다. 남편이 차린 메뉴는 즉석 황태해장국이었다. 예전에는 해외까지 가서 굳이 한식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에 김치나 반찬을 챙겨가지 않았다. 그러나 먹는 걸로 고생을 한 후로는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김치나 깻잎 같은 것을 넉넉하게 챙겨서 떠났다.
오늘의 메뉴는 즉석 황태해장국과 볶은 김치였다. 해장국은 파우치 형태로 나온 거여서 냄비에 붓고 끓이기만 하면 완성되었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서 벌써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남편은 어서 먹어 보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해장국을 떠서 한 입 먹었다. 그다지 맛이 없었다. 무엇보다 살짝 꼬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대충 건더기를 몇 점 건져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남편이 참견을 했다.
" 해외에 나와서 국물을 버리면 안 되지. 그러지 말고 쭈욱 들이켜. 많이 걸을 텐데 든든하게 먹어야지"
남편은 나에게 국물을 남김없이 먹을 것을 종용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를 무시할 수 없어서 그릇째 들고 천천히 국물을 마셨다. 남편은 옆에서 " 그렇지. 쭉쭉 "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국물을 다 마시고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넣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그 강도가 점점 심해졌다.
" 여보, 혹시 아까 먹은 거, 유통기한 지난 거 아니야?"
남편은 쓰레기통에 버린 봉지를 꺼내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 지나긴 했는데 얼마 안 지났어. 3개월 정도 지났으니 괜찮아"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황태해장국이라면 구수한 냄새가 나고 먹었을 때 입안에 가벼운 기름기와 함께 황태의 깊은 맛이 우러나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내가 먹은 해장국은 뭔가 꼬릿하면서 입맛을 상하게 하는 냄새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쭉쭉 들이키라는 남편의 말에 국물까지 다 들이켜다니. 나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남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남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남편은 워낙 장이 튼튼해서 웬만큼 상한 음식에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고 나는 장이 약해서 조금만 상태가 안 좋은 음식을 먹어도 고생을 하는 편이었다.
오늘 아침에 유난히 상쾌하더라 했다. 반대편 건물 창가에 작은 화분들도 다정해 보였다. 그런데 남편이 건넨 독배를 의심 없이 먹어 버리다니. 남편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라면 반드시 유통기한을 확인했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비위가 상하는 냄새를 맡았을 때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때 늦은 후회를 한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의 장에서는 계속 꾸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고 나는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 챙겨 온 약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의 장을 진정시키고 이 여행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약국에서 약을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국 근처에 오자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숙소 근처에 작은 약국이 있었다. 화장품과 약을 같이 파는 대형 매장이 아니라 약만 판매하는 작은 약국이었다. 밖에서 보니 약사는 키가 크고 샤프하게 잘 생긴 남자였다. 이탈리아에 미남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약사까지 그렇게 잘생긴 미남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약사에게 차마 '설사약 주세요'라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줌마였는데 그래도 미남을 보니 본능적으로 수줍음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나를 따라온 남편을 쳐다보았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이 남자였다. 유통기한이 지난 해장국을 한국에서 챙겨 온 것도 이 남자였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남편이야 상한 음식을 먹고 설사를 해도 살이 빠질 거라고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나처럼 장이 예민한 사람에게 유통기한 지난 음식은 독약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가서 약을 사 오라고 말했다. 남편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이 남자는 한국에서는 말도 많고 자신감도 넘치고 넉살도 좋은 편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양 좀 많이 달라고 식당 아줌마들에게 애교도 부린다. 그러나 외국에 나오면 이 남자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일단 무척 공손하고 표정까지 착하게 변한다. 특히 나에게 절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영어도 나에게 꼭 물어보고 입 밖으로 내는 편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탈리아 약국에 가서 설사약을 사 오라는 미션을 부여했으니 남편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남편이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의 오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유통기한이 훌쩍 지난 고약한 해장국을 먹게 했고 특히나 국물을 버리면 안 된다며 압박해서 국물까지 다 먹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고 어쩌면 여기에서 여행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태까지 왔다. 그리고 저렇게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에게 설사약 달라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 그러니 당신이 약을 사 와야 한다.
남편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남편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남편은 핸드폰으로 구글 번역기를 열고 검색을 시작했다. '나는 설사를 합니다'는 이탈리아어로 ' 호라 디아르 레어'였다. 남편은 약국 앞에서 그 문장을 몇 번 더 연습했다. 특히 디아르에서 르 발음을 심하게 굴리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발음을 반복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는지 남편은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남편은 약국 카운터 앞에서 약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손에 약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약을 건넸다.
남편의 키는 175이다. 한국에서는 성인 남성의 표준 정도 될 것이다. 그러나 190 정도 되는 이탈리아 약사 앞에 서 있으니 남편은 꼬마처럼 보였다. 혹시라도 소매치기를 당할까 봐 크로스백의 줄을 최대한 짧게 해서 가방을 배 앞으로 바짝 매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우스꽝스러웠다. 그래도 남편은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냈다. 그리고 키가 장대만큼 크고 늘씬한 이탈리아 남자보다 배가 앞으로 튀어나온 이 한국 남자의 뒤태는 어딘가 나름 귀엽고 정감이 가는 구석이 있더랬다.
어쨌든 남편은 미션을 완수했다. 혼자의 힘으로 생전 처음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약을 사서 나온 것에 스스로 감격했다. 남편은 아마 앞으로도 이 문장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