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새하얀 벽과 모던한 가구들, 푹신한 소파, 앙증맞은 2인용 식기, 오렌지 빛 조명, 이런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의 신혼집은 낡은 빌라 반지하였다. 나는 지방 사택에 살고 있었고 남편은 반지하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서울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그 반지하가 우리의 신혼집이 되었다.
신혼집 근처는 빌라 건물이 모여 있는 빌라촌이었다. 빌라는 대부분 빨간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건물마다 반지하 세대가 있었다. 우리 집에도 창문은 있었다. 그 창문은 인도에 붙어 있었고 옆으로는 차가 다닐만한 길이 있었다. 창문으로 햇빛을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건물은 북쪽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창으로 흐릿하게 들어오는 빛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집에 물이 들어찼다. 그럴 때는 남편과 물을 밖으로 퍼내야 했다. 그 물은 당연히 깨끗한 물이 아니었다. 오물과 더러운 잡동사니들이 섞여 있는 구정물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면 집에서는 쿰쿰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반지하에서의 살림이란 그렇게 불편한 것이 많았다. 밤에는 번쩍하고 창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라기도 하고 근처에서 들어오는 담배 연기 때문에 힘든 날도 있었다. 실내는 습기로 축축하고 오래된 다락방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법 신혼의 재미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매일 서로의 퇴근을 애타게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목을 빼고 기다렸다. 멀리에서 남편을 태운 버스가 보이면 수많은 버스 중에서 그 버스만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을 위해서 집밥 같은 집밥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는 집 근처 슈퍼로 갔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는 고작해야 계란 프라이나 김치전 정도였다. 매장을 구경하다 보니 뼈 없는 냉동갈치가 있었다. 뼈가 없으니 먹기에도 편하고 그냥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되는 제품이었다.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데다가 생선이니 건강에도 좋을 거라는 생각에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계란 한 판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밥을 안치고 계란말이를 했다. 계란말이는 식당에서 나오는 것처럼 반듯한 모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만들었다. 이제 갈치구이를 할 차례였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냉동갈치를 올려서 굽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프라이팬은 남편이 오랫동안 쓰던 것이었다. 바닥에 코팅이 다 벗겨지고 겉이 시커멓게 변해 버린 프라이팬에서 갈치는 익어갔다. 금방 해서 고슬고슬한 밥과 계란말이, 그리고 갈치구이를 올려놓으니 그럴듯한 밥상이 완성되었다. 남편은 나의 솜씨랄 것도 없는 밥상에 행복해했다. 그때는 모든 것을 좋아 보이게 만드는 신혼의 마법이 아직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갈치구이 냄새를 빼는 데 며칠을 고생했다. 냄새를 빼려고 창을 열었는데도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밤이 되어 훤하게 불 켜진 방이 밖에서 다 들여다 보여서 창문을 오래 열어놓을 수도 없었다. 창문을 열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몇 번을 하고 그 난리를 피우고 겨우 냄새를 뺐다. 아니 냄새가 어느 정도 빠졌다고 생각을 했다.
일정한 냄새를 오래 맡으면 둔감해지는 후각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에는 분명히 괜찮았는데 다음날 출근하고 보니 내 옷에서 냄새가 났다. 습한 공기와 생선 비린내가 뒤섞여서 내뿜는 뭔가 쿰쿰한 냄새, 그 냄새는 나의 가디건에 깊숙이 배어서 몸을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꿀 때마다 흐릿한 냄새를 발산했다. 좁은 사무실에 여러 명의 팀원들과 같이 앉아 일하다 보니 나는 하루 종일 팀원들의 눈치가 보였다.
그 후로는 갈치구이에 정이 떨어졌다. 냄새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때 먹었던 냉동갈치가 퍽이나 맛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갈치구이는 형편없이 얇고 쉽게 부서졌다. 나중에는 숫제 젓가락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할 정도로 살이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맛도 밍밍한 것이 별로였다.
반지하에서 갈치를 구워 먹고 그 냄새에 시달렸지만 그렇다고 우울하지는 않았다. 비록 습하고 낡은 반지하였지만 따뜻한 집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서 녹초가 된 후에 털레털레 집으로 걸어 들어올 때 멀리서 우리 집 불빛이 보이면 금세 안도감이 밀려왔다. 반지하 창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따뜻한 불빛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익숙한 내 물건들이 있는 집으로서의 역할에 반지하빌라는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 힘들었던 것은 사실 반지하에서의 삶보다 반지하를 바라보는 편견 같은 것이었다. 비만 내리면 침수가 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반지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팀장은 그 후로 눈에 띄게 나를 무시했다. 그는 서울에 아파트를 서너 개 사놓고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사람 눈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반지하에 살고 있는 내가 마음껏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팀장의 삶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사람들에게 돈 10원도 쓰고 싶어 하지 않는 지독한 면모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부자가 되어서 어디에 돈을 쓰려고 저렇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생각해 보면 반지하에 산다고 해서 삶이 그렇게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삶은 어디에서 사는가 하는 것보다 누구와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는 것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