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어느 날 아들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전화를 받는 방법이 뭔가 이상했다. 아들은 핸드폰 벨이 울리자 전화를 받으며 " 네, OOO학생입니다"하고 전화를 받았다. 옆에 있던 나는 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에게 걸려온 전화니?"
"담임선생님한테 걸려온 전화예요"
"그런데 너한테 걸려온 전화인데 왜 이름을 말하고 전화를 받아?"
"선생님이 혹시 제 이름을 모를 수도 있어서요"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의아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고 전화를 거는 사람이 번호를 눌렀을 테니 당연히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마치 자기가 전화를 먼저 거는 사람처럼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이다. 보통 그런 전화를 받는다면 '안녕하세요'라거나 '네. 선생님'이라고 받아야 하지 않는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아들은 설명을 덧붙였다. "선생님이 제 이름을 모를 수 있어서 혹시나 해서 그렇게 받는 거예요. 선생님들은 공부 못하는 아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아들은 얼마 전 체육선생님께 자료를 받을 일이 있어서 친구와 함께 교무실로 갔다고 한다. 같이 간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는데 선생님은 공부를 잘하는 친구의 이름만 불러 주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아들에게는 아는 체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까 선생님이 자기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아서 아들은 무안해졌다. 그리고 거기 서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 장면이 머리에 그려진다. 선생님들의 커다란 집무용 책상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선생님들이 중간중간 앉아 있었겠지. 아들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선뜻 교무실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밖에서 조금 머뭇거렸을 테지. 그러다가 자신감 있게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친구를 따라서 아들은 교무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긴장한 상태로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자신에게 눈길 한번 보내지 않는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같이 간 친구에게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농담을 거는 선생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자기에게도 한 마디쯤은 해 주겠지 하고 기대를 하지만 그 기대는 부질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마 교무실을 돌아 나오면서 선생님이 자기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어 버렸겠지. 그래서 사람에 대한 아니 어쩌면 선생님들에 대한 실망이 조금 더 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만 기억하고 있다고 씁쓸하게 결론지으면서 말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장난기가 많고 엉뚱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했지만 노는 것도 잘하고 수업 시간에 장난도 자주 치고 점심 도시락은 언제나 쉬는 시간에 까먹어 버렸다. 그 날은 아침 조회가 있었다. 모든 학생은 운동장으로 집합하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 날따라 장난기가 발동을 했다. 추운 날씨여서 밖으로 나가기 싫기도 했다. 나는 운동장으로 나가지 않고 어딘가 숨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교실을 나와서 복도를 조금만 걸어가면 왼쪽으로 화장실이 있다. 나는 그 화장실에 숨었다.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한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딘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나 말고도 몇 명이 더 화장실에 숨는 것 같았다. 그 상황이 너무 스릴이 있어서 화장실에 숨어 있는 우리들은 서로 킥킥거리는 소리를 참으며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숨은 놈들, 다 나와"
바로 학생주임의 목소리였다. 학생주임은 입술이 얇고 곱슬머리의 건장한 남자였다. 그 선생님은 평소에는 말이 없고 과묵한 편이었지만 화가 나면 좀처럼 화를 쉽게 풀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이 쩌렁쩌렁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이내 여기저기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몇 명의 학생들이 화장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처럼 화장실에 숨은 아이들은 두 명이었다.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아이들은 당시에 노는 친구들이었다.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에 스프레이를 심하게 뿌려서 머리에 힘을 잔뜩 주고 아침이면 남자아이들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특별히 이상하거나 무서운 아이들은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고 늘 엎드려 있거나 자고 있기는 했지만 아이들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나름의 순수한 구석도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한 줄로 서 있었다. 그러나 세 명 모두 그다지 긴장하거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설마 화장실에 숨은 것이 큰 죄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선생님이 몇 마디 주의를 주고 교실로 들어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쭉 둘러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쫙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른 영주라는 아이의 뺨을 갈기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지연이라는 아이에게는 머리통을 심하게 후려쳤다. 나는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OOO, 교실로 들어가, 너희들도 들어가"하고 소리를 쳤다.
우리는 모두 비실비실 겁을 먹고 교실로 들어갔다. 뺨을 맞고 머리통을 맞은 두 친구들은 뭐라고 중얼거리며 심한 욕을 뱉어냈다. 나도 심한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다른 벌을 받았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나머지 두 명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아이들에게 시종일관 '이 섀끼들'이라는 욕을 하고 나에게는 이름을 불렀으니 말이다. 나는 그 두 명의 친구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마치 선생님과 한 패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모욕적인 처벌을 받은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똑같은 잘못을 했는데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더 함부로 취급을 당했다. 그리고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잘못에 대해서 가중처벌을 받았다. 나는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교실로 들어가라는 처분반 받은 것이었다. 이름조차 불려지지 않고 심한 욕설과 함께 불려졌던 그 두 명의 친구들도 엄연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들이었다.
아들이 전화받는 것을 보고 아들의 설명을 뒤이어 들으면서 그때의 장면이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날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똑같은 교복을 입은 채 서 있던 우리에게 다른 무게로 내려졌던 처벌이 떠올랐다. 그때 심하게 맞았던 친구들은 오래도록 억울하고 분한 심정이었겠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한 명만 처벌에서 제외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가혹한 체벌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 상처는 아주 오랫동안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 기억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일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묻혀서 금새 나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 기억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 때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감정과 함께 말이다. 언제나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 공부를 하지 못하고 존재감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취급당하던 그 아이들의 얼굴이 얼마나 섭섭하고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이름이 불리지 않고 있다. 알게 모르게 학교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도 당연한 것처럼 배우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못 하기 때문에 존재감 없이 어딘가에 앉아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뒷자리를 채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나이가 많아진 나의 심장도 이름이 불려진 순간 더 맹렬하게 뛰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강당에서, 혹은 회의에서 내 이름이 불려지면 느슨하게 놓여 있던 나의 감각은 팽팽하게 긴장하고 나의 모든 감각들은 나의 이름에 집중한다. 오랫동안 불려진 나의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그 힘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이 불려질 때 나라는 사람은 다시 나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나에게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주기도 한다.
아이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 존재감이 없는 아이들, 친구가 없어서 무리에서조차 불려지지 않는 아이들,
이제 어른들이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아이들을 편견 없이 똑같은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시간 말이다.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 누군가는 꽃이 될 것이다. 하늘에서 빛나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그 소리는 이내 아름다운 운율을 갖추고 그 목소리는 상대방의 가슴을 조용히 두드린다. 이제 아이들의 이름을 진심으로 불러줘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