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새로운 여직원이 우리 조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그 여직원은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웨이브 머리를 어깨까지 내리고 있어서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였다. 꾸준한 관리가 그 비법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녀는 처음부터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더니 친하게 지내자고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부자였다. 사실 내 기준으로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녀는 일단 강남에 아파트를 한 채도 아니고 두 채나 가지고 있었다. 그 정도 부자는 직원들 중에도 꽤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엄청난 부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녀의 돈 씀씀이는 정말로 화끈했다. 그녀가 입고 다니는 옷들은 모두 버버리나 프라다 같은 명품이었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면 새로운 명품백을 들고 나타나고는 했는데 그 가방을 산 이유는 그냥 기분 전환 목적이었다.
" 발령받은 기념으로 명품 가방 하나 샀어요"
" 얼마 전부터 기분이 자주 가라앉는 것 같아서 하나 샀어요"
버버리나 프라다 같은 브랜드의 점퍼나 코트가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매일 바뀌는 그녀의 옷들이 신기했다. 도대체 저게 다 얼마인 거야? 기분이 좀 우울하면 그냥 몇백만 원짜리 가방을 막 사는 거야?
나는 우울할 때 주로 무얼 하는지 생각해 보니까 동네 호수를 걷거나 아니면 맛있는 커피를 먹거나 아니면 인터넷 쇼핑을 했던 것 같다. 그래 봐야 주로 세일 카테고리를 이용하거나 작은 소품을 사는 정도로 만족하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여직원과 자주 어울리고 커피도 마시고 하다 보니 내 마음속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이 감정이 도대체 뭘까? 나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감정의 정체는 바로 부러움이었다. 나는 바로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명품 가방과 명품 점퍼를 부러워하고 지갑을 열어서 카드를 거리낌 없이 좍좍 마구 긁어대는 그녀의 손가락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 옷들이 비싼 브랜드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그녀의 스타일이 단정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옷들이 그렇게 비싸다는 걸 알고 나니까 무척이나 고급스럽게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매일 바꿔 들고 나타나는 가방들은 얼마나 부티가 좔좔 흐르는지. 나는 그녀의 명품 가방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내가 명품 가방을 부러워하다니. 나는 나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나의 평소 모토는 ' 명품을 부러워하지 말고 내가 명품이 되어라'였다. 언제나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오던 내가 명품 가방과 명품 점퍼를 보고 부러워하다니 이것이야 말로 위선과 가식의 끝판왕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나의 물질적인 본능을 애써 무시하고 살았던 건가. 아니면 갑자기 이 나이에 물욕이 어디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건가. 뭐라고 결론 지을 수 없었지만 나는 점점 더 찌질하고 이상해져 갔다.
그러다가 나의 이상한 찌질함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내 자리로 오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내 가방을 보고 "가방 예쁘네요"라고 말했다. 내 입에서 우물쭈물 나온 대답은 "이거 싼 거예요"였다. 그녀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때 나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귀를 빙빙 맴돌았다. 물건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에게 이 물건은 싼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웃으며 고마워요라고 말했을 텐데 어딘가 찔리는 사람처럼 싼 물건이라고 대답을 해 버리다니. 나는 나답지 않은 나의 행동에 놀라고 부끄러웠다.
이 가방은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가방인가. 해외에서 직구로 구매한 가방이었다. 국내에서 사려면 25만 원은 줘야 하는 가방인데 8만 원 정도에 구매를 했다. 전체가 가죽으로 된 데다가 사피아노 재질이어서 웬만한 충격에는 스크래치도 생기지 않는 가방이다. 색깔은 고급스러운 유광의 네이비 칼라였다. 나는 이 가방을 들 때마다 가격과 품질에 모두 만족했는데 내 입으로 이 가방이 싼 물건이라고 말해 놓고 나니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나라는 사람과 나의 가치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피하고 싶어 졌다. 그녀와 마주할 때마다 자꾸 그녀와 나를 비교하고 있는 내 의식의 흐름이 부담스러웠다. 그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슬그머니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양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바람에 거의 절반도 먹지 못하고 음식이 남아 버렸다. 나는 나의 남은 돈가스를 포장해 달라고 했다. 식당 아줌마는 호일과 비닐봉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내가 호일에 돈가스를 싸려고 하자 그녀는 기겁을 하며 나를 말렸다. 호일에 어떻게 음식을 싸 가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식당 아줌마를 호출했다. 호일에 어떻게 음식을 포장해 가냐고 짜증스럽게 그녀가 말하자 아줌마는 다시 들어가더니 종이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호일에 싸 가지고 가는 것이 아무 문제도 아닌데 그녀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너무 정색을 하는 바람에 남은 돈가스를 포장한 비닐봉지를 들고 나오는 게 민망하게 생각되었다.
돈가스집을 나와서 옆에 카페로 이동했다. 1500원짜리 저렴한 커피를 파는 가게였다. 그렇지만 맛은 제법인 곳이다. 1500원이지만 내 입에는 스타벅스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디카페인 메뉴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고 스타벅스는 너무 멀리 있었다. 결국 그녀는 못마땅한 듯이 다른 음료를 주문했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 얼마 전에 내가 선물한 화장품 그거 발림성이 안 좋죠?"
그녀는 얼마 전에 나에게 얼굴에 바르는 파운데이션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특별히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잘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대뜸 그 화장품이 별로니까 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 화장품을 버리지 않았다. 거의 새 물건이나 다름없는 것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그런데 사실 몇 번의 그런 해프닝이 있고 나서부터 나는 사실 더 이상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하게 어떤 포인트에서 그녀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부러워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 그녀가 돈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감각한 것이 나의 정서와 맞지 않아서인 것 같다.
버버리나 프라다 명품 점퍼도 (내 기준으로는) 그 가격을 주고 살 정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나에게는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할 정도의 가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금방 사서 몇 번 바르지도 않은 화장품을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논리였다. 호일과 비닐에 남은 음식을 대충 포장해 와서 한 끼를 해결하는 나의 궁상맞은 알뜰함이 훨씬 속 편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가난을 알고 자랐다는 사실이 가끔은 가슴이 아플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 네 자매를 보고 있노라면 가난이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묘한 버릇이 있는데 네 명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있는 버릇이다.
서로 새로운 옷을 입고 있을 때 " 얼마 주고 샀어?"라고 물어보면 " 이 옷 원래는 얼마짜리야. 그런데 말이야. 폭탄 세일을 해서 이러저러해서 결국 얼마에 샀지"라고 자랑스럽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긴 설명을 들어주기 싫을 때 우리는 원래 가격 말고 산 가격을 말하라고 하면서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어렵게 자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폭탄 세일을 너무나 좋아하고 그렇게 싸게 물건을 사고 나면 누구보다 뿌듯하고 행복해한다는 것을 말이다. 몇 년 전에는 동대문에서 브랜드 옷을 80프로 세일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네 자매가 출동한 적도 있었다. 변변한 매장도 없이 도로변 행거에 걸려 있는 옷을 골라 잡는 행사였는데 우리는 다들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쇼핑에 푹 빠졌었다. 그리고 다들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오면서 정말 보람찬 하루였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엄청나게 큰 행복이 찾아오는 것보다 작고 소소한 행복이 여러 차례 찾아오는 것이 사람을 훨씬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것에 행복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인생에서 만족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았던 기억이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것에 행복해지려면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행복을 발견하는 눈을 가져야 하고 행복을 잡아내는 촉수를 민감하게 단련시켜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내가 행복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역시 행복은 발견의 문제였다. 혹시 오늘 발견 못하고 지나친 행복은 없었는지 돌아봐야겠다. 오늘도 나는 네이비 색깔의 가죽 가방을 메고 있다. 멜 때마다 만족스러운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