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요?

#북유럽에서 컵라면을 만나는 순간

by 느리게 걷기

20년 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되었다. 회사에서 연수 형태로 보내주는 여행이었다. 코스는 러시아 모스크바로 들어가서 북유럽 일대를 여행하는 코스였다.


여행은 일반적인 패키지 여행과 다를 바 없었다. 커다란 버스에 올라타면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취재를 나온 기자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받아 적었다. 가이드가 앉아 있다가 일어 나는 순간 우리의 수첩도 펼쳐졌다. 그때는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은 기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이드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가이드가 창밖 풍경이나 곧 도착하게 될 장소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 그걸 기록하려고 모두 가이드에게 집중했다.


러시아에서는 제법 한식당에 갈 일이 있었다. 식당의 이름은 아리랑이었다. 메뉴는 주로 김치찌개나 두부전골 같은 것이었다. 양념이 좀 적게 들어간 것 같은 희수무례한 김치찌개가 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맛있게 먹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패키지 여행 일정에 다들 치지기도 했고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 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을 한 공기 더 추가해서 먹고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그러나 북유럽으로 이동하고 나서는 한식당에 가기가 힘들었다. 가이드 설명으로는 북유럽이 워낙 넓기도 하고 한식당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정에 포함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아침은 주로 호텔 조식이었고 점심은 근처 레스토랑, 저녁은 뷔페였다. 처음에는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는 호텔 조식이나 저녁 뷔페 메뉴에 감탄했다. 그런데 북유럽은 생선을 즐겨 먹는 모양이었다. 연어나 이름 모를 생선구이들이 자주 나왔는데 한국에서 먹던 고소한 생선의 맛과 많이 달랐다. 북유럽의 생선은 무척이나 짠맛이 나고 기름져서 조금만 먹어도 금방 속이 느글거렸다.


일행 중에서 어린 편에 속하던 내가 그 정도였으니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의 고충이야 말 못 할 지경이었다. 아침에 호텔 조식당에 내려가면 아저씨들이 먼저 내려와 있었다. 아저씨들 앞에 놓인 접시에는 샌드위치 몇 쪽과 딸기잼 정도가 올라가 있고 옆에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아저씨들의 표정에는 음식을 막 가져다 놓고 식탁에 앉은 사람의 설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흔한 대화조차도 나누지 않았다. 삶에 아무런 의욕도 없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잔뜩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실의에 잠긴 표정이 어찌나 심각한지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못해서 식빵을 집어 들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저'오늘 하루도 움직여야 하니까 먹는다' 하는 그런 몸짓이었다. 마치 엄마가 억지로 입에 넣어준 밥을 씹지도 않고 한참 동안 입에 물고 있는 아이처럼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다 빵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커피로 입을 헹구고 미련 없이 조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음식 때문에 힘들어하게 되었다. 유람선에서 2박을 하는 코스가 있었는데 배에서는 삼시 세끼 뷔페가 나왔다. 이 뷔페는 당연히 잡채니 갈비니 초밥이니 하는 음식이 나올 리가 없는 뷔페였다. 그것은 온통 생선과 연어와 샐러드의 향연이었다. 그나마 그중에서 먹을만한 것은 과일과 빵 정도였다. 이틀 정도 그런 기름진 음식을 계속 먹으니 속이 느글거리면서 아무것도 먹기 싫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교차가 심한 날씨 때문에 심한 감기 몸살까지 찾아왔다.


밥도 먹지 못하고 골골거리는 내가 불쌍했는지 인솔을 하던 분이 컵라면 하나를 몰래 주었다. 이 분은 컵라면이나 반찬을 챙겨 왔는데 여행 초반에 일찌감치 소진을 했다고 했다. 아마 여행 초기에 남자들끼리 팩소주와 컵라면을 먹으며 친분을 다진 모양이었다. 이제 이거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는 나에게 마지막 남은 컵라면을 양보했다. 그분이 컵라면을 내밀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컵라면이라니. 나는 너무 감동해서 컵라면을 받아 들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조식당에 컵라면을 가지고 내려갔다. 호텔에 투숙객이 우리밖에 없어서 컵라면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라면 수프 냄새가 훅 올라왔다. 머나먼 타향에서 혹사당하던 나의 위는 익숙한 냄새에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컵라면의 면이 익기를 기다리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놀라고 말았다. 많은 눈들이 나의 라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눈은 간절하게 국물 한 모금 얻어먹을 수 없을까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누구를 정해서 국물을 나눠 준단 말인가. 물론 내 앞에 앉은 영돈 씨는 전날 과음을 했기 때문에 딱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차피 모두 나눠 줄 수 없으니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컵라면 뚜껑을 고깔 모양으로 접었다. 거기에 라면을 올려놓고 뜨거운 김을 조금 식힌 후 입으로 넣었다. 매콤하고 짭짤하면서 자극적인 맛이 나의 혀를 간지럽혔다. 오랫동안 면을 씹어서 삼키고 컵라면 그릇 째 국물을 들이켰다. 라면 국물이 나의 식도를 지나서 아래 어딘가로 내려갔다. 국물은 나의 혈관을 타고 맹렬하게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해 푸석푸석하던 나의 몸에 뜨거운 열과 에너지가 한꺼번에 보충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라면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라면을 비워냈다. 혹시나 국물이라도 얻어먹을 까 기대하던 사람들은 가능성이 사라진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그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후로 그 맛을 찾을 수 없었다. 똑같은 감동과 맛을 기대하며 같은 컵라면을 먹어 보았지만 그 감칠맛과 얼큰하면서도 시원했던 맛은 없었다. 혹시나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라면도 먹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라면이 특별히 맛있었던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준비도 없이 나간 해외여행에서 배를 곯는 경험을 하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탈이 나고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때의 컵라면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는 음식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것은 주린 위장일 것이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의 오랜 결핍일 것이다. '


오늘같이 매섭도록 추운 날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 혹시나 그때의 맛이 나올까?

컵라면 한 그릇의 소중함을 소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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