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정도 전에 금요일이었다. 회사 복도를 지나가다가 옆 팀 여직원과 마주쳤다. 오랜만이네요.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의례적인 인사말도 나누었다.
" 정말 제 얼굴이 좋나요?"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이 부분에서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 싶었다.
" 네. 얼굴이 환하고 좋아 보이네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화장품을 바꿨는데 본인도 놀랄 정도로 피부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제품을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 비싼 거겠죠. 수연 씨는 항상 비싼 제품만 쓰잖아요"
내가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비쳤다. 그녀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아주 저렴한 화장품이니까 부담 없이 추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저렴하다는 말은 얼마나 주관적인 표현인가. 누구에게는 20만 원, 30만 원도 저렴한 화장품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2만 원 3만 원도 저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냥 저렴하다는 표현을 내 기준으로 나는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출근을 하였을 때 그녀가 내 자리로 찾아왔다. 그녀는 다시 화장품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때 화장품 얘기를 했었지. 나는 화장품에 대해서 잊고 있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며칠 전의 일을 기억했다.
" 혹시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 건데요. 진짜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이 화장품은 OOO 제품이에요. "
그녀 입에서 나온 화장품은 다단계 화장품이었다. 다단계 제품을 거의 써보지 않았지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약간의 거부감이 생겼다. 그녀는 열을 내며 제품에 대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친정어머니와 주변 지인들이 화장품을 사용한 뒤로 놀라운 효과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생각들이 마구 뒤섞여 들쑤셔지기 시작했다.
' 그녀는 우리 사무실에서도 가장 부자인데 설마 돈을 벌려고 다단계를 하는 것은 아닐 거야. 정말 제품이 좋아서 저렇게 열정적으로 권유를 하는 거겠지'
하지만 전혀 반대의 가정도 해 보고 있었다.
' 아니야. 부자들이 더 지독하다고 하잖아. 저렇게 다단계까지 하면서 돈을 악착같이 번 거 아니야? "
그래도 워낙 저렴하다고 했으니 한 두 개 정도는 사야 되겠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주 저렴하다고 했던 화장품의 가격이 저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꾸만 무슨 디바이스 제품이라는 것을 권했다. 디바이스는 그러니까 전기로 충전해서 얼굴에 문지르는 그런 기기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제품들이 30만 원짜리도 있고 20만 원짜리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거절하는 게 좋을 지 머릿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 생각해 보니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 나중에 살게요. 너무 비싸네요" "내가 원래 쓰는 제품이 있어요" 그러나 그녀의 태도가 너무 적극적인데다가 내 말을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다 보니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금새 힘을 잃고 말았다. 곤란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이 제품들이 모두 환불이 가능한 제품이고 그만큼 품질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그때 나를 찾는 전화가 울렸다. 나는 전화벨 소리에 감사함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는 정신없이 일처리를 하느라고 그녀와의 일을 얼마간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 반응을 보였으니 그녀가 더 이상 의욕적으로 덤비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 늦게 그녀가 다시 내 자리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예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에서 제품들을 꺼내 설명하려고 했다. 사람들이 조용히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화장품을 꺼내 놓고 설명을 하려고 하다니 나는 깜짝 놀라서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그녀는 자리를 옮긴 후에 일단 선물이라고 하면서 컵라면을 몇 개 내밀었다.
예전에 읽은 설득 관련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아주 작은 선물이나 무료 증정품을 주게 되면 그다음부터 고객들은 쉽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무료 샘플이나 마트의 무료 시식행사 같은 것이 모두 그런 의도로 기획된 행사였다.
그런 의도까지 생각을 했던 걸까. 그녀는 무료 컵라면과 칫솔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략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녀는 아침에 침을 튀기며 칭찬했던 제품들과 그 외에 몇 가지 유명한 제품들이라며 화장품을 죽 꺼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태도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거침이 없는지 나는 완전히 수세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때쯤 나의 머리는 이미 멍해져 버렸고 거절의 의지는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제 나는 전략을 바꿔서 최대한 저렴한 무언가를 사고 이 상황을 일단락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쇼핑백에 들어 있는 제품들 중에서 몇 가지를 가지치기하고 나머지 가격을 물었다. 그래도 10만 원 정도 하는 가격이었다. 나는 곤란한 생각에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선심 쓰듯이 결재는 다음 주에 해도 된다고 말했다. 이미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고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다음 주에 돈을 입금하기로 하고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사무실에 들어오니 다른 여직원에게 메신저가 날아왔다. 그 여직원도 화장품 권유를 받아서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은데 좀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제품이 어떤 것인지 고민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뒤쪽에 앉아 있는 남자 신입사원도 특정 제품을 추천받아서 지금 고민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집합이란 말인가. 행복해야 할 금요일 오후에 원하지도 않는 커다란 쇼핑백을 옆에 가져다 놓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전화로 걸려오는 스팸이나 처음 보는 사람의 제품 권유에는 언제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아서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마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마주치고 같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는 관계가 이런 복잡한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 앞으로 그녀와의 사이는 더욱 불편해지겠지. 아마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의 관계 지속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웃으며 다가올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벌써 사무실에 가기가 두려워지니 말이다.
그녀가 내게 건네준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기분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더욱 불편한 사실은 그 쇼핑백에 카달로그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카달로그는 어찌나 두꺼운지 웬만한 잡지책 한 권 정도의 두께였다. 그녀는 나에게 주말 동안 그 카달로그를 찬찬히 구경해 보라고 했다. 이 좋은 주말에 쇼핑 카달로그라니.
결국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 못한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혹시라도 카달로그에 들어 있는 수많은 제품의 소비로 이끄는 무시무시한 유혹을 끊어내야 하는 일이다. 벌써부터 두렵다.
이럴 때는 차라리 다른 사람의 기분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소심한 나의 성격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감정과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감정에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아, 역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