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창문을 내렸다. 퇴근 후에 만나는 바깥 공기는 언제나 상쾌하다. 잠깐 사이에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온도도 냄새도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음악을 틀었다. 이제 차가 출발하면 나는 회사에서 조금씩 멀어져서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묻혀 온 음울한 먼지들을 털어내기도 전에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핸들이 한쪽으로 쏠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역시 기분 나쁜 신호에는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나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상냥하다. 잘 훈련된 애완견 같은 목소리가 나의 목에서 어색하게 새어 나온다. 팀장은 빠르게 용건을 쏟아낸다. 갑자기 상무님이 질문을 하셨는데 그 질문에 답하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팀장은 9시쯤에 전화를 걸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시 고쳐 말했다. 자신이 대응할 수 있는 내용이면 전화 안 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것이다. 전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안 하겠다는 것인지 그의 말만으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의 판단은 언제나 상식을 뒤엎고 예측을 불허하니까 말이다.
전화가 끊어지고 음악 볼륨을 높여 본다. 그러나 이미 음악은 상해 버린 음식처럼 생기를 잃어버렸다. 퇴근 후에도 예고 없이 찾아와서 일상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떠난 익숙하고 불쾌한 목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 본다.
내 머릿속에는 어떤 기억이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 팀에서 일하다가 쫓겨 난 남과장에 대한 기억이었다. 몸이 비쩍 마르고 얼굴에 유독 살이 없는 남자, 마치 무거운 추를 얼굴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얼굴의 근육이 사정없이 아래로 처진 남자, 웃고 있어도 어딘가 우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얼굴, 그런데 나는 남과장이 진짜로 우는 것을 보았다.
그 날 팀장은 남과장을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회의실에 들어간 팀장은 흥분하였는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고 그중 의미 없는 말들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자연히 사무실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조용해졌다. 다들 그 새어 나오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꼈으니까.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누군가가 처절하게 당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맥락을 파악할 만큼의 소리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곧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팀장이 회의실에서 나온 후에도 남과장은 나오지 않았다. 회의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남과장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는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팔을 헝겊인형처럼 축 늘어뜨리고 얼굴을 파묻은 채 말이다 나는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가 만약 얼굴을 들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을까.
그렇게 남과장은 쫓겨났다. 그는 끝까지 기회를 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 정도로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다면 박차고 나갈 법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비굴했다. 그는 한 번도 얼굴을 치켜들지 않고 약간 숙인 자세를 유지하며 팀장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한 번 만이라는 말은 결국 팀장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그는 주말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도둑 고양이처럼 들어와서 짐을 싸서 떠났다.
폭력을 당하는 사람만큼 폭력을 지켜보는 사람도 괴롭다. 팀장한테 치욕적인 언어 폭력을 당하는 남과장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폭력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 폭력은 너희들 모두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폭력이야. 내일은 너에게도 이 폭력은 찾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똑똑히 봐 두라고. 너희들의 처지와 팀장의 입장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남과장이 물리적인 피해자였다면 우리들은 감정적인 피해자였다. 우리는 남 과장이 그에게 굴복하고 굴종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굴복하는 방법을 배웠다. 팀장은 키가 160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매일 회사에 올 때마다 키가 커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는 우리가 고개를 들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거인이 되었고 우리는 아주 작은 개미가 되어서 책상 위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팀장의 전화를 기다렸다. 8시 30분, 8시 40분, 시간이 느리고 끈적대며 흘러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만 지루하고 답답한 줄 알았는데 싫어하는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은 그보다 더 지루하고 숨 막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계는 9시를 훌쩍 넘었다. 그러나 팀장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9시 20분이 넘었다. 이제 전화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자기가 해결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 해결한 모양이다.
나는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호수 주변으로 운동할 수 있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호수에는 오리 가족들이 헤엄을 치고 있고 아이들이 그것을 가까이 보기 위해서 호수 주변에 모여 있다.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해서 그 평화로움 속에 나도 기꺼이 섞이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 평화로움에 한 발 내딛기도 전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불안한 가슴으로 전화기를 들어 보니 팀장이다.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빠르고 쏟아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혹시 밖이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나의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전화한다고 하지 않았나? 라고 그는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짧은 하나의 문장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장이었다.
내가 전화한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의 전화를 기다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지. 감히 내 지시를 무시하고 말이야
그의 짧고 거친 문장에서 나는 그의 의도를 읽었다. 벌써 몇 년째 그런 식의 말하는 방식을 경험했으니 이제 그의 표정이나 숨소리에도 어떤 감정이 실려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가서 자료를 열어 놓고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내 옆으로 조금 전 느리게 걷던 연인들과 아이들이 스쳐갔다. 조금 전 그들은 선명하고 뚜렷한 모습이었는데 내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들은 흐린 배경처럼 뒤로 조금씩 물러나며 사라져 갔다.
나는 달리고 있다. 내가 달리는 동안 나는 어느새 남과장의 얼굴로 바뀌었다. 지금 달리고 있는 것이 나인지 남과장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달릴 뿐이다. 숨이 턱에 닿지만 나는 멈출 수 없다. 조련된 개처럼 나는 어둠 속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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