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등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등산의 기억이라고 해 봐야 회사 체육대회 때 올라가 본 것이 고작이었다. 팀장이나 부장의 취향에 맞춰서 체육대회 장소는 청계산이나 북한산이 되곤 했다. 앞장서서 올라가는 나이 지긋한 부장 뒤에서 우리는 묵묵히 따라 올라갔다. 가끔은 무거운 보온병에 커피를 넣어서 올라가기도 하고 막걸리를 들고 가기도 했다. 산에 올라가서 마시는 커피는 일품이었지만 그렇다고 커피 때문에 산에 올라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려올 때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게다가 그 날은 꼭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났다. 모처럼 운동을 했다는 보상심리와 회사에서 나오는 회식비 본전 생각 때문에 배가 터지도록 바비큐를 먹어대고 허리띠를 풀며 집으로 돌아오면 남는 것은 늘어난 몸무게뿐이었다. (가끔은 하루 만에 2킬로가 찌기도 했다)
남편은 최근 몇 년 동안 등산에 푹 빠져서 토요일마다 후배 몇 명과 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주말에 집안 일도 않고 혼자 산에 가는 걸 미안해했다. 산에 갔다 와서 집 청소도 하고 요리도 했다. 대단한 체력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말 내내 남편이 내 눈치를 보고 나는 큰소리치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뻔뻔해지기 마련이었다. 언젠가부터 남편은 살금살금 원정등산을 가기 시작했다. 새벽 5시면 살그머니 나가서 밤이 되어야 들어왔다. 그럴 때는 샤워만 하고 뻗어 버린다. 집안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나에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겹살이 먹고 싶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오겹살에 시원한 냉막걸리를 먹고 싶다고 예상 도착 시간까지 알려왔다. 마음 약한 나는 투덜투덜하면서 오겹살을 사러 나간다. 집 앞에 정육점이 있지만 남편이 원하는 오겹살은 마을버스 2 정거장 거리에 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남편이 주문한 오겹살과 막걸리를 사기 위해 달린다. 자전거 손잡이에는 삼겹살이 담긴 비닐봉지와 막걸리가 담긴 비닐봉지가 양쪽에서 달랑거린다. 나는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사랑의 위대함과 나의 희생정신에 스스로 감탄한다.
나도 산에 오르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남편에게는 산이 나를 부른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고 사실 급격한 체중 증가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다. 몸무게는 인생 최대치를 가뿐히 뛰어넘었고 옷장에 있는 옷들을 다 버리고 새로 사야 할 판이었다.
산에 가는 날이면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난다. 남편은 평일보다 주말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주말이 길어지고 하루를 이틀처럼 알차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남편의 말을 명언이라고 인정한다. 우리는 둘 다 눈을 뜨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남편은 베이글 샌드위치를 만들고 나는 과일을 챙긴다. 남편은 1. 5리터짜리 생수병에 집에서 끓인 물을 챙긴다. 결명자, 계피, 몇 가지 약재를 넣고 끓인 물이다. 가끔은 김밥도 싼다. 산에 가는 건지 놀러 가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준비하다 보면 기분이 설렌다.
이번에는 청계산을 올랐다. 내려올 때는 경사가 완만한 길을 택해서 내려왔다. 테이블이 보여서 짐을 풀었다. 사방이 초록이다. 황사가 걷힌 하늘은 맑고 바람은 가끔 소리 내서 불어왔다. 바람이 어찌나 좋은지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처음 산에 올라갈 때는 많이 힘들어서 중간중간 쉬었다. 도저히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할 것 같아서 중간에 내려오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힘들었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는데 술 취한 사람 같았다. (술은 입에도 안 댔는데 사진 속에는 술 취한 아버지 얼굴이 있었다)
처음 산에 갈 때 남편과 나의 간격은 꽤 많이 벌어졌다. 남편은 한참 앞에서 걷다가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고 말을 건다. 남편이 하는 멘트는 주로 3가지 유형이었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올라와? 컨디션이 안 좋아?"
" 할 수 있어. 힘내, 파이팅"
" 지금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하면 돼"
이 세 가지 멘트는 느낌이 다 달랐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 올라오냐는 말을 들으면 힘이 빠졌다. 내가 그렇게 못 하고 있나? 하는 생각 때문에 기운이 빠졌다. ' 할 수 있어. 힘내. 파이팅' 이런 말은 부담스러웠다. 남편이 앞에 서서 파이팅하는 동작을 하고 있으면 제발 먼저 가라고 손짓을 했다. 옆에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볼까 봐 부끄러웠다. 잘하고 있다는 말은 칭찬처럼 들렸다. 오늘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한 생각도 들고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힘을 내기도 했다.
말이란 것은 참 신기해서 어떤 말을 듣는지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몸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독려할 때 어떤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아이들에게 ' 할 수 있어. 힘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스스로 많이 부족하고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무작정 힘내라는 말은 그다지 힘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뒤늦게 해 보았다. 격려는 상대방을 향해서 하는 것인데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격려는 나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산을 내려온다. 힘겹게 한 발 한발 올라가던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올라갔기에 내려올 수 있다. 올라가면서 잔뜩 흘린 땀 때문에 열기가 올랐던 얼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살면서 마주치는 일들이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과 닮아 있다.
사람들에게 혹은 아이에게 격려할 일이 생기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겠다.
" 지금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