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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06. 2020

내 삶에도 마법 같은 순간이


  삶의 쓸쓸함을 일찍 알아버렸다.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했고 막내를 먹일 분유도 늘 부족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틈만 나면 부엌으로 숨어 들어서 분유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놓고 몰래 빠져나왔다. 대문 앞에 숨어서 분유를 오래 씹어 먹으면서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


 결핍의 시대였다. 집에는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것들이 턱없이 부족했고 가족 간에 즐거운 소음이 발생할 일도 거의 없었다.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는 것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우리는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서 환영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막내 우는 소리만 나도 가슴이 조여드는 것처럼 불안했다.


 엄마는 구멍이 생긴 티셔츠 팔꿈치에 천을 덧대고 바느질을 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좋았지만 그래도 어울리지 않는 색 조합 때문에 누가 봐도 팔꿈치를 기운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옷이 싫었다. 하지만 그 옷을 입기 싫다고 떼를 부릴 만큼 철부지는 아니었다.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갈 때마다 나는 주눅이 들었다.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몇몇 아이들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선생님 심부름을 받은 아이는 신이 나서 교무실에서 물건을 가져오거나 가끔은 학교 밖으로 나가서 만두를 사 오기도 했다. 우리는 심부름이 선생님의 사랑의 징표라 믿었고 그 징표를 받고 싶은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했다. 그러나 한 학기가 다 가도록 나는 심부름 기회를 얻지 못했고 팔꿈치를 기운 행색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쓸쓸해했다.


 게다가 홍이 무리는 나를 괴롭히는 재미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생쥐 같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 골목에는 가로등조차 없었다. 세상은 나에게 무관심했고 지나치게 무심했다.


 마법은 9월의 어느 날, 교실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은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우리 반 친구가 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선생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나는 몹시 얼떨떨했는데 선생님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 박동이 마구 올라가기 시작했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열에 들떠 있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생각에 빠져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했다.


 며칠이 더 지나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선생님이 잘못 알고 얘기한 건 아닐까.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다. 사실 나는 글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주 뒤에 정말로 내 글이 실린 책과 상장이 날아왔다. 나는 내가 한 번도 오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연단을 올랐다. 사실 조회가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벌벌 떨고 있어서 연단에 오를 때는 비틀거리다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단 위에 누구보다 침착하게 올라가서 상장을 고 발이 꼬이는 실수 없이 무사히 내려왔다.


   누가 내 인생에 마술을 부려 놓은 것 같은 순간들이 시작되었다. 나는 글짓기부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나는 오랫동안 무대 밖에 서 있다가 무대 위로 올라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걷는 곳으로 가로등이 하나씩 일제히 켜지기 시작해서 짙게 드리운 어둠을 조금씩 걷어갔다. 세상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사소한 일에 칭찬을 받기도 했다.


  홍이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홍이는 보기보다 영악한 데가 있었다. 마주치면 일부러  어깨를 밀어서 나동그라지는 걸 보고야 마는 놈이었는데  그는 곧 나에게 흥미를 잃었다. 아니 어쩌면 계속 나를 괴롭히면 골치가 아플 수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내 삶에 마법 같은 순간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가끔 그  순간을 떠올려 본다. 그러면 나는 다시 열한 살의 나로 돌아간다. 나는 울지 않고도 그 시절을 견뎌냈으니 앞으로도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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