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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08. 2020

제사가 뭐길래

아빠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모든 상황은 처음보다 희망적이었다. 개복하기 전에만 해도 의사는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 판독 결과는 3기 말에서 4기 정도였다. 의사가 수술하기 전에 두께를 확인해야 한다고 뱃살을 다소 무례하게 움켜잡았을 때 아빠는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늘 운이 좋은 편이었던 아빠는 이번에도 본인이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지 입증해 보였다. 위암 수술 최고 권위자인 의사 지휘 하에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암세포도 예상보다 작은 크기였다. 위암은 예후가 좋기 때문에 이제 회복만 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단이 터진 것은 수술이 끝난 며칠 후였다. 그동안의 걱정과 긴장이 한 꺼풀 벗겨져서 병실에서도 얘기 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오던 밤이었다. 엄마는 평소에는 아빠 앞에서 하지도 못하던 얘기를 꺼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렸으니 엄마에게도 농담할 기운이 생겼던 모양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제 제사 그만 지냅시다'라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아빠가 별 반응이 없자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싶거든 앞으로는 당신이 직접 지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스무 살에 시집을 와서 이제 칠십 살이 다 되었으니 오십 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일 년에 여덟 번이었는데 가을 제사는 며칠 간격으로 연달아 있었다. 음식이 남아도 먼저 만들어 놓은 음식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또다시 장을 보고 제수 거리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제사 음식은 또 얼마나 많이 준비를 했는지 제사가 끝나면 박스에 전과 남은 나물을 싸서 삼촌들 편에 들려 보냈다. 삼촌들은 탕국을 담아가기 위해서 작은 찜통까지 들고 왔다.


  제사가 되면 모처럼 먹을 게 풍성해서 우리는 좋았지만 엄마에게는 지옥 같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 고모들에 동네 사람들까지 다 불러서 먹일 정도로 제사를 크게 지냈다. 쥐뿔도 없는 집안에서 제사를 그렇게 떠들썩하게 했으니 맏며느리인 엄마는 제사가 지긋지긋할만했다. 게다가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삼촌들은 병문안 한번 오지 않고 전화로 안부를 대신했으니 엄마 입에서 제사 그만 지내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환자복을 얌전하게 입고 보호자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던 아빠는 갑자기 돌변했다. 아빠는 먹고 있던 요구르트를 한 손에 들고 던질 듯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다 필요 없으니 당장 병실에서 나가라는 게 아빠의 주문이었다. 가뜩이나 심장이 약한 엄마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놀라서 병실을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그리고 엄마는 입원병동 휴게실에 들어가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차라리 엄마가 아빠 욕을 하거나 한 섞인 신세타령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그저 가만히 앉아서 텔레비전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 딱해 보였다. 엄마는 6인실에서 그 사단을 냈으니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어떻게 보냐고 병실로 다시 들어갈 일을 걱정했다.

 

 어쨌든 아빠는 아직 환자였으니 엄마는 어색한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화해를 했다고 하는데도 그 후로 아빠는 말수가 줄었고 엄마도 아빠 옆에 있지 않고 자꾸 나가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가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줄 둘 다 몰랐을 것이고 얼떨결에 마주한 상대방의 속내에 허둥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후에도 엄마는 쉽게 제사를 그만두지 못했다.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사에 인이 박혀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제사를 정성껏 지내지 않으면 조상이 노한다는 말을 평생 듣고 살았으니 이미 반은 세뇌된 상태였을 것이다. 엄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장을 보고 자전거에서 몇 번을 넘어지면서도 쉽게 제사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다 허리에 쇠를 박는 큰 수술을 하고 나서야 반강제로 제사를 내려놓았다. 제사 때만 되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죄스러움과 이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늙은 육신에 대한 회한으로 엄마의 표정은 더 무겁고 침통해 보인다.


  오십 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고슬고슬한 쌀밥과 탕국을 제사상에 올렸는데 조상님은 참 무심하기도 하다. 긴 세월 동안 죽도록 제사상을 차리던 엄마는 주변에서 가장 늙고 병약한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며느리 대접을 받지 못했으니 제사를 억척스럽게 잘 치르는 것으로 맏며느리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제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그렇게라도 본인의 존재를 당당하게 증명했으니 말이다.


그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체념과 한숨이 있었을까? 그 까마득함을 나는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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