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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09. 2020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야심


 그녀가 그렇게 야심가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파티션을 가끔 넘어오긴 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친한 사람이 없었고 회사에서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후에 피곤할 때는 건물 마당을 혼자서 빙빙 돌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녀의 출근은 늘 아슬아슬했다. 그녀는 9시가 다 되어서 사무실을 들어왔는데 손에는 근처 카페에서 산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그 시간에 들어오는 다른 직원들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거나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녀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사람이나 동네 카페에 마실을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그녀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의 책상 옆에는 항상 가방이 반쯤 벌려진 채로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언제든 짐을 빠르게 챙겨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업무 능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실수를 하면 주변 사람 탓으로 돌리고 변명을 늘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당연히 그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챈 것은 얼마 후였다. 그녀는 아침부터 불안해 보였는데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갔다 오고 공연히 정수기 앞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상무님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특별한 용건이 있냐는 질문으로 비서에게 1차 제지를 당했다. 그녀는 특별한 용건은 아니지만 오늘 꼭 상무님을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비서는 오늘 상무님 컨디션이 안 좋으니 다른 날에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단호한 태도로 비서를 무시하고 상무님 실로 진격했다.  

 

 상무님 집무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직원 대부분은 그 곳에 가는 걸 싫어했다. 우리는 행여 복도에서 상무님과 마주칠까 봐 화장실 가는 시간도 조절할 정도였다.  상무님은 말이 없고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보고 후에 생각 좀 하고 살라는 차가운 목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그러니 특별한 보고나 용건 없이 상무님 실로 들어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호기롭게 노크를 하고 상무님 실로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그녀도 그 순간에는 아마 상당히 긴장했을 것이다. '오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로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작년 3분기 실적이 안 좋았을 때 직원들은 좌절하고 낙심했다. '그때 상무님이 격려하고 돌파구를 찾아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3분기 위기를 이겨내고 4분기에 매출 초과 달성을 했을 때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녀가 얘기하고 싶은 요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상무님의 리더십에 감동했고 기회가 되면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것으로 그녀의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야기 끝에는 감정이 복받혔는지 그녀는 살짝 눈물까지 글썽였다.


 상무님은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서 열정적으로 본인을 칭찬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었다. 상무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이 있으니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용건 없는 방문에 불쾌했을법도 하다.


 그런데 그 날 상무님은 심하게 울적한 상태였다. 출근길에는 접촉사고가 나서 앞의 차주와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주간회의에 지각을 했고 부사장에게 몇 가지 지적을 받았다. 특히나 부사장은 올드한 조직을 벗어나서 젊은 판단력과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그 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상무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입고 사무실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녀는 긴장해서 약간 말을 더듬기는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렇다. 오늘 하루 운이 없었을 뿐이지.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능력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이 직접 찾아와서 그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표현해 준다는 것은 그가 존경받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울적함은 이내 사라졌다. 오히려 새로운 자신감과 의욕이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상무님은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의 활약도 기대한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어깨를 정답게 두드려 주었다.  


 그 후로 그녀는 운이 좋았다. 그녀는 성과분석회의에서 대표로 발표하는 기회도 얻었다. 그녀는 발표를 잘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들렸고 비음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상무님은 그녀의 발표에 만족했고 긴장한 모습이 더 진정성 있어 보인다는 평가를 했다.


 결국 연말에 그녀는 파격적인 승진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는 아무도 그녀가 그렇게 야심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한 가지 슬픈 사실은 동료들이 그녀의 승진을 축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쯤 아랑곳할 그녀가 아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이제 자주 파티션을 넘는다.


사진출처: https://www.judaica-art.com/henri-matisse/2138-portrait-of-lydia-delectorskaya-the-artist-s-secretary-by-henri-matisse-oil-painting-art-galler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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