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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25. 2020

엄마들 단톡방의 처참한 결말

엄마 카톡방과 명예훼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부모 총회에 참석해서 연락처를 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단톡방이 만들어지고 엄마들은 단톡방으로 초대를 받는다. 거기에는 불편하면서도 점잔을 빼는 대화들이 종종 이어진다. 주로 카톡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형태는 이런 식이다. 반대표 엄마가 카톡으로 뭔가 새로운 공지사항을 보낸다. 그러면 엄마들은 "수고 많으세요" "너무 감사합니다. "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런 답을 보내게 된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뭔가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어서도 안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반 대표를 중심으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반대표는 선생님과 정기적으로, 혹은 자주 만나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고 선생님의 성향을 파악해서 자기와 친한 엄마들에게 정보를 특별히 공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파와 거기에 끼지 못하는 세력으로 나눠지기도 하고 간혹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평일 저녁에 카톡 알람이 울렸다.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공지사항이 왔나 싶어서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예상치 못한 카톡 문자에  당황했다. 카톡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서연이 엄마입니다. 성욱이 때문에 카톡을 보냅니다.

  성욱이가 1학기에도 저희 딸을 몇 번 괴롭혔는데 며칠 전에 또 저희 아이를 꼬집었습니다.

  성욱이의 폭력적인 성향을 치료해 주세요. 지금 잡지 않으면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


    서연이 엄마는 내성적인 엄마였다. 엄마 모임에 올 때 직접 만든 레이스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서연이라는 아이도 엄마를 닮아서 팔다리가 길쭉하고 날씬한 아이였다. 엄마 모임에서 항상 조용히 듣고 있다가 돌연 어떤 화제에서는 갑자기 열을 내며 이야기를 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의외로 주관이 확실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내 느낌이 일부분 맞았나 싶기도 했다.

   

   문자 내용은 따지고 들면 크게 문제가 될 내용은 아니었다. 남학생의 괴롭힘을 참던 엄마가 폭발해서 순간적으로 보낼 수도 있는 문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자가 상대방 엄마를 지정해서 보낸 문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카톡방에는 32명이 들어와 있었다.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카톡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성욱이 엄마가 답을 보낼지 주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럴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카톡방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아무도 다음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말썽꾸러기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이제 막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눈치가 빠른 여자아이들보다 남자아이들이 눈치가 없고 둔하다 보니 말썽을 많이 일으킨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악행(?)을 들어보면 딸아이 엄마 입장에서 화가 치밀지만 사실 얼굴을 마주하면 다들 아직 아기 같은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큰 애를 키워 보고 이제 둘째를 학교에 보낸 입장이라 조금 여유가 생겨서 말썽꾸러기들한테 다소 관대한 편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들이 말 못 할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려니 해서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다


  우리 반에는 그런 말썽꾸러기가 두 명 있었다. 둘 다 남자아이였고 여자아이들을 놀리거나 괴롭히는 것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성욱이와 세진이라는 아이였다. 그런데 세진이 엄마는 열심히 엄마들을 달래고 비위를 맞추는 쪽이었다. 그 엄마는 정원이 있는 강남의 식당에서 아이 생일 파티를 열었다. 반 아이들을 초대해서 정원에서 놀게 하고 엄마들도 초대했다. 그 식당이 꽤 고급스러운 곳이어서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세진이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던 엄마들도 일부 우호적으로 입장이 돌아섰다.  


   그에 반해 성욱이 엄마는 엄마 모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학부모 총회에는 참석했는데 그 후로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엄마들 모임에, 그것도 초등 1학년 엄마 모임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엄마는 쉽게 구설수에 오른다. 특히나 성욱이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엄마들은 아이가 저렇게 말썽을 피우는데 어떻게 엄마가 모임에 나오지도 않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들 했다. 이렇게 엄마가 관심이 없고 아이가 가정에서 방치되어 있으니 행실이 점점 더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들이 모여서 아이를 비난하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를 비난하는 잣대라는 것도 그다지 균형 잡혀 보이지 않는다. 때로 엄마가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집의 아이는 철없는 귀염둥이로 엄마들이 봐주는데 반해서 엄마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아이는 유난히 혹독한 비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독 엄마들 모임에서 성욱이의 이름은 쉽게 오르내렸다. 한 엄마가 성욱이한테 당한 일을 얘기하면 다른 엄마들도 너도 나도 겪은 일이나 생각을 말하고 성토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집단 최면 같은 상태가 오는데 그것은 그 아이가 정말 엄청나게 나쁘고 질이 안 좋은 아이로 엄마들 사이에서 낙인찍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분노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자신감 때문에 분노는 무모한 용기로 변하게 된다.  


    어쨌든 성욱이 엄마가 존재감이 없었고 엄마 모임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했기 때문일까? 서연 엄마는 공개 문자 혹은 저격 문자를 단톡방에서 용감하게 보냈다. 공개적으로 그런 문자를 보낸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를 하더라도 심하기는 했다.  

 

   그 문자를 받고 며칠이 지났을 때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바로 성욱이 엄마가 서연 엄마를 고소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명예훼손으로 말이다. 카톡 문자가 공공의 사람들에게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판단되면 고소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고 한다. 성욱 엄마는 서연 엄마가 본인에게만 카톡을 보내거나 연락을 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반 엄마가 보는 공간에서 그런 카톡 메시지를 보낸 것에 대해서 분명한 명예훼손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법의 판단도 그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적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상황은 바로 양쪽 부모들이 경찰서에 출동을 하고 나서 발생했다. 양쪽 부모들이 다 모이고 보니 성욱 엄마와 서연 아빠는 아는 사이였다. 그것도 둘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더군다나 근무하는 층도 같았다. 성욱 엄마는 회사에서도 직급이 꽤 높았고 서연 아빠의 직급은 낮았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서연 아빠였다고 한다. 같은 팀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던 사이인데 아이 문제로 얽힌 것도 민망하고 거기다가 본인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 고소를 당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사실 직장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아무래도 직급이 낮은 사람이 심정적으로 더 불편한 것이 현실이다. 거기다가 혹시 성욱 엄마가 인사권이라도 행사할 수 있는 지휘에 있는 사람이라면 서연 아빠는 아마 눈 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어떻게 얘기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양쪽은 어찌어찌 합의를 했다. 그리고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다음날 그 단톡방에서 빠져나오라는 반대표의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한 명씩 한 명씩 그 단톡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단톡방은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희극적인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을 받아서 공개적으로 카톡을 보낸 엄마의 충동적인 흥분도 이해가 가고, 공개적으로 아이 이름이 거론된 데 대해서 충격을 받았을 성욱이 엄마의 고소 카드도 이해가 간다.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엄마들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기가 힘들다. 엄마들은 아이와 관련해서 종종 지나치게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초등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킬 때쯤 엄마들에게 아이는 온 세상과 같다. 아이에 관한 한 판단력은 약해지고 때로는 비상식적인 행동도 하게 된다. 하지만 메시지 중간중간 나오는 '폭력'이라거나 '치료'라는 단어는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 단어였다. 막상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꼬리표가 붙게 되면 그 엄마도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결국 성욱이는 이사를 갔다.


    엄마가 된다고 해서 바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면서 때로는 아이처럼 울고 아이처럼 싸우고 그리고 아이처럼 유치해진다. 그런 홍역 같은 시간을 거치면서 조금 차분해지고 다른 아이들을 이해하기도 하고 다른 엄마들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한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행복한 시간과 힘든 시간을 동시에 경험한다.


  성욱이와 서연이, 그리고 그 두 아이의 엄마들이 받았을 상처가 지금쯤은 다 치유가 되었을까?


  

  시간만큼 좋은 약이 없으니 그 상처는 이제 다 아물어서 흔적도 없어졌을 거라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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