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리게 걷기 Oct 01. 2020

철부지 며느리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이었다. 나는 나의 신분(?)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아빠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조카들과 동생들을 통틀어서 8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 나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공부를 곧잘 했기 때문에 친척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사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명절이 되면 방에 틀어박혀서 책을 보다가 심심하면 나와서 전을 집어 먹곤 했다.


  엄마와 숙모들이 일을 할 때 같이 일을 거들거나 설거지를 하는 법도 없었다. 집에는 나 말고도 일할 여자들이 충분했다. 좁아터진 주방에서 엄마와 숙모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 엄마 논리는 일이란 것은 잘하면 잘할수록 더 시키는 법이니 아예 배울 생각도 말라는 것이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엄마는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지만 시골에서 농사와 집안일에 잔뼈가 굵은 터라 웬만한 집안일을 척척 해냈다. 엄마는 부엌일도 능숙해서 10명이 넘는 대식구의 칼국수를 홍두깨로 밀어서 직접 만들었다. 처음 시집와서 아무것도 모를 때 일 잘한다는 칭찬에 신이 나서 뭣도 모르고 그렇게 칼국수를 밀고 커다란 솥에 육수를 내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칼국수를 끓여 냈다. 일 년에 10번 가까이 있는 제사를 거침없이 치러내는 엄마는 큰 딸인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밖에서 시끌벅적하게 음식을 만드는 소리,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고 상을 펴는 소리를 들으며 방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가끔은 배추전이나 오징어 튀김을 접시에 담아다 놓고 젓가락으로 입에 집어넣으며 동생과 민화투를 쳤다. 명절은 나에게 그야말로 늘어지게 노는 날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처음 명절을 맞게 되고 나니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우리 집이 아니라 '남편의 집'으로 가야 했다. 남편의 집과 우리 집은 같은 도시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분이 더 이상했다. 큰길을 지나서 재래시장을 지나서 5분 정도만 걸으면 바로 우리 집인데 나는 익숙한 우리 집이 아닌 '남편의 집'으로 가야 했다. 게다가  방이 2개뿐이었다. 방 1개에는 시아버지가 비스듬히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남은 방에서는 시동생이 팝송을 연습하고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은 주방밖에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결혼식 때 왔던 고향 친구들에게 인사하러 나간다고 하는데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거야말로 소공녀 세라가 기숙학교에서 공주 대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학교 청소부 신세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빨간색 앞치마를 내밀었다. 앞에 '진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앞치마였다. 앞치마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앞치마 타령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징어 손질을 맡겼다. 오징어를 반으로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고 눈을 잘라서 튀김을 하기 적당한 크기로 자르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오징어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오징어는 물컹물컹했다. 그리고 눈은 또 어찌나 징그러운지 나는 오징어를 손질하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손이 큰 여자였다. 오징어는 모두 10마리였다. 내가 한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한 손으로는 커다란 식칼을 들고 오징어를 엉거주춤 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기가 막히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그냥 시장에 가서 덧버선을 사 오라고 했다. 사실 주방 바닥은 냉골이었다. 아주 옛날부터 주방에 불을 안 넣었다고 하는데 양말을 신고 있는데도 발이 시렸다. 불편하고 어디에 앉을 곳도 없는 데다 발까지 시리다니 상황은 최악이었다.  


    나는 얼씨구나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살 것 같았다. 숨통이 트였다. 그런데 그 찰나에 뜬금없이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집이란 바로 '친정'을 말하는 것이다.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차로는 5분 거리였다. 나는 갑자기 지금 꼭 집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엄마 얼굴을 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차를 빼서 친정으로 출발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 가서 그냥 엄마 얼굴만 보고 얼른 돌아오자. 엄마는 얼굴만 보고도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힘든지 다 알 거야"


   그때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나의 차는 미친 듯이 기분 좋게 엔진 소음을 뿜으며 집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해방이었다. 코 끝에 부딪히는 공기조차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깥에 빨간 벽돌로 마감을 하고 1층에는 '슈퍼 '간판을 달고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나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근처에 있는 관공서 건물 앞에 차를 아무렇게나 주차하고 급히 뛰어내렸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중요한 순간에는 예기치 않은 변수가 생기는 법이다. 나는 너무 서두르고 흥분한 나머지 차 키를 안에 두고 차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지금이야 차 안에 키를 두고 내리면 친절하게 '삐'거리는 소리로 정신 차리라고 알려 주지만 그때는 그렇게 자동차가 첨단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때였다. 나의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다. 갑자기 세상이 진공상태가 된 것처럼 길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보험회사에 전화부터 했다. 명절 연휴에도 긴급출동은 금세 연결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연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긴급출동이 지연될 거라는 것이었다. 엄마 얼굴만 살짝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정신없는 와중에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가 2통이나 와 있었다. 마음은 급하고 긴급출동은 오지 않고 길에서 발을 한참 동동거리고 있으니 마침내 긴급출동이 도착했다. 긴급출동 아저씨는 어찌나 기술이 좋은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금세 문을 따 주었다. 나는 덧버선을 사기 위해서 맹렬하게 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결국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에 잠시 도망 나와서 엄마를 만나고 가려했던 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나는 엄마에게 나의 억울한 기분을 마음껏 하소연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명절 준비로 바쁘고 심란해 있을 엄마를 찾아가서 나의 억울함을 토로하려 했던 것은 좋은 계획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알려 주는 황당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 사이 엄마는 허리가 굽고 무릎도 휘어져서 정말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시어머니도 무릎이 망가져서 예전처럼 돌아다니지 못한다. 세월은 우리 모두에게 아픈 흔적을 남기고 유유히 흘러갔다.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차를 몰래 끌고 나와서 맹렬하게 도망가던 철부지가 아니다. 나는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도 나이를 먹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슬프게도 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철이 든다는 것이 이렇게 먹먹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사진출처: unsplash.com


작가의 이전글 엄마들 단톡방의 처참한 결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