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증후군의 역사 -2-

03.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기

by 유맹

언젠가부터 동생과 심리적 거리가 멀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그가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았다. 두 살 터울이었지만 한없이 어리고 귀엽게만 보이던 그의 얼굴에서 분노를 찾기 시작했다. 까칠하고 도도한 게 원래 그의 매력이었는데 그 모습마저 나를 향한 질책 같았다. 때론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와 같은 억한 심정이 들면서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만큼 내 감정변화도 널뛰기 시작했다. 서로 보고 싶은 만화를 보겠다며 리모컨을 빼앗고 뺏기고, 장난감을 더 갖겠다며 싸우기도 했다. 분명 여느 남매들과 다름없는 다툼이었을 테지만 서운한 감정은 풀릴 새 없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어떤 다툼이 있는데, 그가 내게 식칼을 꺼내든 날이었다. 사실 그는 까칠하긴 하지만 싸움을 먼저 걸어오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그날의 원인제공자는 분명 나였을 거다. 내가 선을 넘었고 그의 분노를 끌어냈으며 누나답지 못했는데, 내게 칼을 겨누는 그의 모습에서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나를 미워하는 게 맞았어."


문이 닫히는 열차문에 손을 끼워 넣은 채 고통스러워하던 그와 처참한 몰골로 응급실에 누워있던 그와 일반병실로 옮기고 나서야 겨우 만난 그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 순간까지. 누구와도 나누지 못한 나의 죄책감, 불안, 절망과 같은 감정들이 칼을 든 그의 모습 앞에서 누그러졌다. 차라리 그가 나를 미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까지 시작되면서 우리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길 가다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는 그런 사이.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어도 대화 한 번 안 나누는 사이.




"잘못한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고로, 착하게 살자."


오랫동안 내 정신을 지배한 삶의 모토였다. 실제로 2000년대는 부모님, 선생님에게 착하게 살기를 강요받던 시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누구보다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결과로 중고등학교 때 진정한 친구 한 명 두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나 자신의 문제였다. 나는 친구들에게 누구보다 잘 맞춰주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피곤했다.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언제라도 그들과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신 멀어지는 전제조건에 '절교, 싸움' 같은 건 없었다. 끝까지 착한 친구로 남으면서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 지금 내게 남은 학창시절 친구는 한 명뿐이다. 이 친구 또한 성인이 된 후에 친해진 케이스였다.


사회생활을 하고 여러 험한 일을 겪으면서 착한 아이 증후군은 점차 옅어졌다. 하지만 착하지 않은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기가 여전히 두렵다. 요즘 시대에는 착하게 사는 게 미련한 거라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다. 누구보다 공감하는 바이다. 나의 착한 아이 증후군을 완벽하게 없애준 건 남편이었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 남편 옆에서 지내다 보니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님을 배우게 되었다. 거기다 내 모든 모습을 수용해 주는 그 덕분에 자존감 또한 점점 높아졌다. 이제야 나 중심의 삶,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삶의 태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형성된 성격을 바꾸려면 또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작년 11월, 동생이 10년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우리는 10대 때보단 사이가 가까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적인 대화는 나누지 않는 관계였다. 그래도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착한 아이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동생이 나를 미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참고로, 우리는 경상도 집안이다. 동생은 특히나 더 무뚝뚝하고 무던하며 애교라곤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도움을 청하면 무시하는 법이 없는 의리파였다. 여자친구와 10년 만난 비법도 그런 매력 덕분이었으리라.


밑도 끝도 없이 동생 통장에 500만 원을 이체했다. 사실 갑작스럽게 이사를 준비하게 되면서 자금 상황이 여유롭진 않았다. 축의금 액수를 놓고 두 달 정도 고민을 했는데 그때 남편이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잖아."


그 친구를 '동생'이라 불러도 될지, 내가 '누나'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살면서 두고두고 의심했다. 동생은 열차사고 이후 수술자국은 남았지만 다행히 사고 후유증은 없었다. 키도 작고 삐쩍 마른 꼬맹이가 어느덧 키 180cm의 듬직한 30대 남성이 되었다. 축의금을 보내자마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이 또한 우리남매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누나 이사 간다며? 이렇게 큰돈 보내도 괜찮아? 안 보내줘도 되는데···."


'누나'라는 단어를 들어본 것도 얼마만이던가. 돈을 준 건 나인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벅차올랐다. 통화는 어색했고 별 내용 없이 끊겼다. 그렇게 결혼식장에서도 나는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동생은 결혼하고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다. 둘 사이에 '기혼'이라는 공통점이 생기면서 대화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동생이 평생 한 적 없는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쌓아온 거대한 벽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keyword
이전 04화착한 아이 증후군의 역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