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기
착한 아이 증후군 [ Good boy syndrome ]
: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면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2000년,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기간이었다. 이번 방학도 강원도에 있는 이모댁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모부가 공군이라 이모네 가족은 부대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우리가족은 종종 그곳으로 놀러를 가곤 했었다. 군부대 안이라 수영장 등 시설 이용료가 저렴한 편이었고, 또래 사촌들도 있어서 우리남매에게 그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그날도 경남 양산에서 강원도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랐다. 중간에 환승을 했는지까진 기억이 안 나는데 12시간을 꼬박 걸려 강원도를 갔었다. 70대 외할머니와 엄마, 9살 나, 7살 남동생이 함께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아빠가 정말 바쁘게 일을 하던 때여서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함께 보냈다.
어린 우리에게 장거리 이동이란 엉덩이가 들썩들썩, 참기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 엄마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장난감 등도 챙겨 왔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가 깨어있을 때는 눈치를 보며 적당히 앉아있다가 졸기 시작하면 이내 동생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묵의 술래잡기를 하기도 하고 숨바꼭질을 하다가 열차 승무원에게 잡혀 돌아오기도 했다. 그만큼 12시간의 장거리는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생이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다.
열차가 정말 많은 정류장에 멈췄다. 새벽이 되자 열차 전체가 고요함에 잠들었다. 열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동생은 비교적 나보다 얌전했는데, 나는 정말 말괄량이, 천방지축 그 자체였다. 이제 열차 안은 시시해졌고 새로운 놀이를 찾느라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 열차가 플랫폼에 잠시 멈췄다가 떠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열차 문이 열리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잠시 내렸다 타는 걸로 하자!
그때만 해도 동생은 누구보다 내 말을 잘 따랐다. 그렇게 우리는 위험한 게임을 시작했다. 가위, 바위, 보! 한 번이 어렵지 막상 해보니 스릴도 있고 재밌었다. 그렇게 역에 멈출 때마다 게임의 강도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한 번 내렸다 타는 거였는데 나중에는 2번, 3번씩 내렸다가 타는 걸 반복했다. 성별이 다른 남동생이라도 7살 유치원생과 9살 초등학생의 신체조건은 확연히 달랐다. 내가 가뿐하게 계단을 오르내렸다면 남동생은 단차가 버거웠는지 서툴게 계단을 왕복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게임에서 진 동생이 계단을 2번째 내렸다가 타려는 순간, 열차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놀란 동생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고 문에 손이 낀 채로 기차가 출발해 버렸다. 동생은 동생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는 울며불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우리 목소리에 놀란 엄마가 달려 나왔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엄마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국아, 일단 문에서 손을 빼봐. 기차역에 서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
문제는 패닉상태에 빠진 7살 동생이었다. 열차소리 때문에 엄마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건지, 우리를 영영 만나지 못할 까봐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던 건지. 아직도 그 이유를 듣지 못했다. 동생은 끝까지 손을 빼지 않았고 속도가 붙은 열차의 힘에 의해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엄마도 이성을 잃고 열차 내 구비된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외할머니도 놀란 마음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다. 열차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우리는 그다음 역에서 하차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어린 나와 나이 든 외할머니까지 챙기며 역무실로 이동을 했다. 조금 뒤 들려온 이야기는 동생이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곧장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 만난 동생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옆구리 어딘가에 관을 끼워서 검붉은 피를 빼고 있었고 의식도 없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며칠 혹은 몇 주간 동생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낯선 부천이모댁에 맡겨졌다.
예전 브런치글(링크)에 심리상담센터를 다니던 일화를 쓴 적이 있다. 그곳에 방문한 이유는 직장과 결혼생활의 위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상담하던 중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나에게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어린시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물어봤지만 떠오르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중학생 때 전학을 가면서 초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이 끊겼다 보니 살면서 그 시절을 떠올린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또 신기한 건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시절에 자주 꾸던 악몽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중 가장 자주 꾸던 꿈은 내가 세탁기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세탁기가 돌아갈까봐 두려웠던 기억과 날 구해줄 사람을 애타게 찾던 기억.
악몽과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 도착한 종착점이 이 열차사고였다. 사실 기억 저 편에 묻어둔 사건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부모님과 이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모님은 누나인 나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어색한 이모네에서 지내다 드디어 동생의 병문안을 가던 날, 그날 병실 안에서 나는 내 가족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게 설령 나의 피해의식이라 할지라도 이방인이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벌을 내렸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