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하며 세상에 외치다
뮤지컬 <레드북>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19세기 런던은 변화와 변혁의 시대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대중문화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러 대중문화 중에서도 <레드북>은 글을 쓰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나는 자신의 첫사랑을 묘사한 가상의 인물 ‘올빼미’를 상상하며, 슬플 땐 야한 상상을 하는 소위, “조숙하지 못한” 여성이다.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거리가 먼 인물이기도 하다. 언제나 당당하고, 부당한 일은 그냥 넘어가는 법을 모른다. 안나의 이러한 모습에서 작품 속 여러 남성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맨다. <레드북>은 이 지점에 포커스를 두고 극을 전개해 간다.
극의 시대적 배경 상, 극 중 대다수의 여성은 자신의 욕구와 열망을 숨겨야만 한다. 안나가 하녀 시절 돌보았던 노부인 바이올렛 또한, 오랜 세월 과부라는 사실로 인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열망을 숨겨왔다. 여성 문학회인 로렐라이 언덕의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숨겨가며 글을 써 내려간다.
하지만 이들과는 반대로 남성 인물들은 여성들을 향한 무시와 성희롱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대표되는 인물이 평론가 딕 존슨이다. 그의 이름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남성 권력과 그로부터 파생된 무례함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이용해 안나에게 평론을 써주겠다는 조건으로 성관계를 제안하기까지 하는 만행을 보인다. 극 중 안나와 얽히게 되는 브라운 또한, 극의 중반부까지 안나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난다며 나무란다. 이처럼 여성 인물과 남성 인물 간의 대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여성 인물들을 향한 감정적 동화와 서사적 집중이 가능해진다.
<레드북>의 매력적인 인물로 로렐라이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로렐라이 언덕의 설립자이며, 여장남자이다. 로렐라이 언덕은 여성만이 가입, 활동할 수 있는 문학회로 비치기에 로렐라이의 존재 자체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렐라이가 여장남자로 밝혀지고, 그의 전사가 드러나며 로렐라이 언덕이 가지는 의미는 확장된다. 로렐라이의 본명은 로렐라이가 아니었다. 과거, 로렐라이라는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설에 올라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현)로렐라이는 로렐라이의 정신과 유언을 실현하기 위해 로렐라이 언덕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로렐라이는 남성이지만 여성의 삶과 감정 그리고 차별에 공감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장남자로 사는 삶을 택한 것으로 보아 퀴어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유추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또한 여성과 비슷한, 어쩌면 여성보다 더 많은 사회적 핍박을 받는 소수자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차별받는 여성의 삶에 공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렐라이를 통해 로렐라이 언덕은 여성 문학회로 한정되는 공간이 아닌 사회의 소수자가 연대하고 자유롭게 숨통을 틜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연대는 극 안에서 중요한 가치로 작동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까지 가닿아 연대의 힘을 각성하게끔 하는 힘을 지닌다.
안나는 로렐라이 언덕에서 활동하며 쓴 <낡은 침대를 타고>로 인해 감옥에 갇힌다. 법정의 판결이 잘못될 경우, 안나는 영국 밖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다. 안나와 사랑에 빠진 브라운은 안나를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결국 안나를 회유해 신경쇠약을 주장하자고 하지만 안나는 자신의 글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는 클로이로 인해 브라운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한다.
재판 당일, 안나의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브라운은 안나가 쓴 소설로 인해 런던 사회에 가져온 긍정적인 영향들을 법정에 증거로 제출하며 안나가 쓴 소설이 완결될 때까지 판결을 유보하겠다는 답변을 얻는다.
안나가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브라운의 기지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브라운 또한 작품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안나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나를 구한 것은 일정 부분 안나 자신의 힘도 존재했다. 결국 안나는 자기 자신을 구한 것이다.
안나는 계속 글을 쓰고, 브라운과 사랑한다. 로렐라이 언덕은 더욱 명성을 떨쳐 신입 회원을 받게 된다. 종반부, 안나와 브라운까지 모두 등장해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노래를 부른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 이는 무언가에 속박되지 않고 당당하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라는 말로 관객에게 가닿는다.
작품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 2025년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할 수 없다. 여성에 대한 차별,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현재까지도 일상뿐만 아닌, 사회 단위의 문제로 제기되는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보편적 인권은 인간이라면 가지고 태어나는 천부 인권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제는 당연한 사실을 넘어 그 이상의 가치와 차별, 혐오에 대한 숙고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뮤지컬 <레드북>은 12월 7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