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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선 Mar 25. 2022

노란 집

 

3)

 

연분홍빛 페인트를 칠한 4층짜리 학교 건물이 저만치 보이자 마음 다소 진정되는 듯했다.

6년 동안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정든 곳이다. 졸업한 지 보름, 보름 전까지 저곳에서 우리는 수십 명이 한 반에 모여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운동도 하고 뛰여 다녔다.  이제 다시는 들어갈 일이 없는 곳이라 마음은 쓸쓸하고 허전했다.   같이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몰랐던 십 대의 아름다웠던 친구들이 숨 쉬던 곳, 어쩌면 다시 있을 수 없는 인생의 제일 아름다웠던 십 대들의 방황을 종지부 찍게 해 준 곳이라 그 어느 추억보다 소중한 곳이다.

방학이라 운동장은 한산했다.

좀 전에 있었던 황당한 일 때문인지 아님 여름의 불볕더위 때문인지 다홍빛으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 숨 가쁘게 쉬며 걸음 재촉하는 두 소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학교 건물 뒤 골목을 지나서 얼마 가지 않아 민준이네 집이 보였다. 안도 비슷한 한숨이 입 사이로 터져 나왔다. 벌써 몇몇 친구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대문 사이로 기분 좋게 흘러나온다. 좀 전까지 있었던 불쾌한 일로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던 거뭇한 그림자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날려 가버리고 우리는 행복한 소녀 소년들 마냥 웃고 떠들며 방학 동안 며칠 만나지 못한 정을 나누느라 분주했다.
 그날은 민준이 엄마가 출장 간 사이에 친한 친구들이 모여서 민준이 생일 파티를 해주는 날이다. 고3을 졸업하고 각자 자기의 운명대로 떠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절친들이 모여서 이 방학에는 서로 생일파티를 해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생일파티는 간단했다. 만두를 빚고 한 두 가지 냉채와 볶음채를 만들고 케이크랑 선물을 준비하면 된다. 우리는 같이 웃고 떠들고 서로의 정을 나눌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들과 다 나누지 못한 정들을 서로에게 전해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홍연이는 만두소를 만들고 민준이는 반죽하고 나랑 준희는 동그랑땡이랑 만두피를 맡았다. 나머지 애들은 곱던 밉던 속을 넣고 만두를 빚는다. 평소에 부모님과 언니 오빠한테서 신부름을 해주고 받아 낸 돈을 모아서 케이크 랑 선물을 샀다. 누구 돈을 더 많이 내고 적게 내는 걸 별로 따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만두를 빚고 있는 홍연이의 얼굴은 행복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마치 아무도 몰래 벚꽃 즙을 훔쳐먹은 것처럼 연분홍 빛으로 물들어 막 터질 것 같았다.
 “야! 그렇게 좋아? 얼굴이 확 폈는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 싶어!”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그만 쳐다봐.”
 “근데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 불안해!”
 “뭐가?”
 “어느 날 질투의 신이 날 질투라도 해서 지금 이 행복을 다 빼앗아 갈 가봐 두려워!”
 홍연이는 자기의 행복이 금방이라도 누구에게 빼길 것 같은 착각으로 눈에 맑은 이슬을 차 올리며 울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해도 입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참으로 미묘한 것 같다. 종일 참새처럼 종알거리던 홍연이는 민준이 앞에 서면 다소 곳 해지고 가끔은 애잔한 슬픔 같은 감정에 빠져 감성 소녀로 변한다. 지금 저 모습처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할 때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드디어 머리가 어떻게 되어가는구나!”
 민준이를 쳐다보면서 내가 어이없다는 뜻이 머리를 젓으니 민준이도 실눈을 해가며 행복해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죽는다는 게 어떤 걸 가?
 민준이와 사귀면서 행복에 빠져 있다 가도 홍연이는 간혹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고 했다. 왜 서일가?
 너무 행복하면 두려움이 심술궂게 찾아오나 보다. 맑은 눈물을 글썽이며 입가에 미소 짓고 있는 홍연이를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도 이름 못할 슬픔이 괴어올라 와 그 어떤 위안의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가시나 쓸데없는 소릴 해가지고 마음만 심란하네. 지금 행복하면 됐지.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을 미리 해서 괜히 정서불안증으로 이상해지지 말고.”

꽤나 근사하고 푸짐한 생일상이 차례 지고 파티는 시작되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민준이 소원을 빌 차례다.

《빨리 소원을 빌어!》

눈을 감은 민준이는 무슨 소원을 비는지 꽤 진지하게 속으로 소원을 비는 것 같았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홍연이는 빨개진 얼굴로 민준이의 소원이 마음속으로 바라던 소원이길 바라면서 민준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

《그럼 말하지 마!》

《하하하---세상 다 아는 게 무슨 비밀이라고 ㅎㅎ》

《내가 말해 볼가?》

여기저기서 둘을 놀려먹느라 웃고 떠들고 난리다.

민준이가 찬장에서 어머니가 사다 놓은 와인을 들고 왔다.

와인을 보자 또 환호소리가 터진다.

《너네 둘 러브샷 해라!》

민희가 의미 있게 민준이랑 홍연이를 밀어붙이고 러브샷을 해라고 부추기자 친구들도 덩달아 소리 지른다.

《러브샷! 러브샷!》

둘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아닌 보살을 떨며 피한다.  그런 것이 더 재미를 불러일으켜 신난 민희랑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잔에 와인을 무식하게 철철 부어서 둘이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둘은 팔을 꺾어서 서로 엇갈려 걸고 잔을 부딪히며 어색하듯 얼굴을 가까이하고 러브샷을 했다.  홍연이 입가로 핏빛 와인이 주르르 흘렀다.  왠지 소름 끼쳤다.  나는 얼른 홍연이에게 휴지를 건넸다.

《무식하게 그 많은 걸 준다고 다 마셔? 질질 흘리면서...》

그때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와인을 마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와인은 조심스럽게 멋스럽게 홀짝이며 마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칫하면 입 근처에 낭자한 핏자국처럼 얼룩지게 되니깐~

고3 탈출로 큰 해방감을 느낀 우리는 그날 와인이랑 소주 맥주를 섞어서 꽤 마셨다.  민준이 엄마가 올리도 없고 기껏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마음껏 놀고 내일부터는 각자 갈 앞날을 택해서 가야 한다.  울고 싶어 졌다. 이제는 뭐하고 살지? 공부를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다.  농사일,  겁부터 났다. 남자 친구라도 있으면 연애를 하다가 시집이나 가면 될 텐데 아직 남자 친구 하나 만들지 못해서  앞날이 망연했다.

《홍연아, 이제는 가자!》

《벌써! 싫어! 너 먼저 가!》

술을 마시더니 담이 커졌나? 실실 웃으면서 안 간다고 큰 소리다.  어쩌려고? 여기서 자기라도 하게? 귀도 먹먹하고 몸도 나른한 것이 귀찮았다.  너 마음대로 하셔!

《알았어. 민준아, 걔는 꼭 네가 데려다줘. 난 아버지  기다려서 가야 돼.》

말하지 않아도 어련히 데려다 줄 건데... 속으로 혼자 픽픽 웃으며 민희를 찾아 일어서려고 했지만 무릎에 힘이 다 빠지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생일파티를 끝내고 이제는 슬슬 집으로 가야 할 때가 다가오자 연희랑 미희는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하고 있었다. 올 때 있었던 그 불미스러운 일을 민희에게 얘기했더니 집까지 데려 다 줄 테니 걱정 말란다. 당분간은 그 길로 우리끼리 다닐 용기 같은 거는 없다. 홍연이는 민준이랑 어디 갈 때가 있는지 눈만 의미 있게 끔뻑이더니 쪼르르 민준이 꽁무니를 따라 나가려 했다. 혼자 집으로 갈 일이 없는 그녀에게 절대 혼자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쐐기를 박고는 민희 랑 민준이네 집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뭐 할 거야?”
 “아버지 농사짓는 일 도와주다가 선 자리 생기면 시집이나 가지 뭐!"

“너는 뭐 할 건데?”
 “다들 상경하는데 준희랑  큰 시내로 가볼 생각이야.”
 민희의 자전거 뒤에 앉아서 집으로 가는 길은 든든하고 무섭지가 않았다. 학교서 있었던 일이랑 민준이와 홍연이 사귀는 얘기 하면서 집으로 가는 귀갓길은 평안했다. 가을바람이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스쳐 지나갔다.  가을밤 공기는 신선했다. 맑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듯이 흐르고 있었고 들판에서는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아름다운 가을밤, 그 사이를 꿰뚫고 씽씽 달리는 자전거에 우리의 청춘은 싱싱했다. 티 없이 맑은 우정, 서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감정은 천금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방학도 지나가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사슴처럼 슬픈 눈을 가진 조용하고 외로워 보이던 늘 가슴에 말 못 할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던 소년도 슬픈 뒷모습만 남겨놓고 영영 사라지고 뜸해지는 친구들의 소식에 궁금증도 포기한 채 세월은 잘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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