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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선 Apr 17. 2023

시가 머무는 곳

빈 집의 꿈


바람 부는 언덕을 거슬러 가보면


홀연히 살아왔던 세계가 허울처럼 서있다


흥겨웠던 지저귐이 잦아들고


텅 빈 물초롱에


녹물로 엉겨 붙은 세월이


바람에 으깨어진 채 먼지에 섞여 일렁인다




간다는 말없이 창틀 사이로


집안 한 번 훑고 지나가는 바람 따라


그 많던 웃음들 어디론가 다 쓸려가고


흐르는 세월 동결할 듯


한 세기를 우쭐거리던


거구의 건물을


엉성하게 묶어 세우는 휘청거리는 거미줄,




어제의 흔적을 지우는


먼지의 군무에 밀려


여기저기 기우뚱거리는 암벽


그 사이로 시간을 갉아대는 소리가


결집된 공간을 허물어 뜨리며


기울어지는 지구의 한 귀퉁이로


어둠의 고요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빈 뼈대를 부추기고 선 뒤틀린 창틀은


나드는 이 없이 삐걱거리는데


웅크리고 있는 흉물 암벽에 가려져


빛과 바람을 등진 벽지의 위안도


닿은 지 오랜 살가운 손길에 빛을 잃고


쉬쉬거리는 곰팡이에 서식되어


추억마저 지워져 가는


빈 껍질의 음산한 울림이 서성거리고 있다




새겨졌던 번지수는 고인의 이름처럼 희미해져


한낱 휴지조각처럼 헐거운데


어디서 뻗친 욕된 손들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리며


빈 집의 어두운 꿈을 부추겨 자꾸 숲 속의 죽은 나무처럼


도시와 산과 들에


망령들의 흐느낌을 불러 모아


안으로 서성이게 하는 가




걸인의 자취도 움츠리는


아무도 없는 곳


바람이 부대끼는 소리에


쥐들마저 떠난 지 오랜


공터의 빈 울림이 공허하게 울리다 사라지는


황폐해진 누옥의 그림자 우로


날아가던 새들이 떨어뜨린 꽃씨가 향을 흩날리면


누군가의 발길이 닿아


해후의 물줄기가 솟아올라


새들의 지저귐이 몰려오는


햇볕이 어리광 치는 그 사이로


빈 집의 천년 꿈이 몸을 뒤집으며 잠꼬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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