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다독이며

감나무

by 강희선

감나무

사진출처/ 인터넷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한결 부드럽게 가벼워지는 거보니 가을이 오나보다.


한풀 꺾인 불볕더위는 탱글탱글 영글어가는 열매 들위에 마지막 햇볕 한올 마저 쏟아부어 달콤한 즙을 만들려는 듯 열매들의 얼굴을 하나같이 쟁글쟁글 쓰다듬고 있다.


언덕 위에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 간혹 불어오는 갈바람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말라가는 잎새들의 김 빠지는 소리가 그 잎새에 엎드려 우는 귀뚜라미 소리랑 어울려 현악기의 처량한 운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강 건너 저편에 홀로 선 감나무는 붉은 홍시에 불을 지펴 가지마다 초롱불을 대롱대롱 걸어놓고 길목에 묵묵히 서서 갈대숲의 술렁임을 듣고 있다.


깊어가는 밤, 홍시의 주머니마다엔 옹기종기 갈대들의 속삭임이 빨갛게 익어가고 가을 초승달은 쓸쓸한 숲에 차가운 빛을 하얗게 진주처럼 뿌리고 있다. 긴 밤 길 잃을까 걱정이신 어머님께서 걸어놓은 초롱불은 새벽까지 빨갛게 타다가 가을날 아침 풍선처럼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을 조금 더 베여다가 가을날의 둥근 이야기 하나를 꼭 품고 더 붉게 익어가고 있지 않는가?


소싯적 고향을 떠날 때 베어놓고 온 사랑 한 줌을 거기에 동여매여 놓고 그렇게 떠난 그 길을 다시 거슬러 가본다. 거기에 한없이 푸근히 웃고 선 어머니 모습이 갈밭에 흩어진 억새풀처럼 바람에 나부낀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강가를 따라 흐들어지게 이어져가는 갈대밭 끝으로 기러기떼와 함께 날아가고 어머니의 감나무는 저녀녘 어둠을 밀어내고 오늘도 초롱불을 켜켜이 켜들고 섰다.


길 잃을 걱정인 어미의 마음은 거기에서 빨갛게 타들어가는데 철새의 처량한 울음소리마저 잦아드는 가을밤의 산기슭에서 풀잎들이 비벼대는 소리가 사각사각 달빛을 베어 물고 바람에 찢기며 간간이 들려온다.


늦가을의 바람을 이고 선 감나무는 늘 어머니를 상기시킨다. 홍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저렇게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들이 가는 골목마다 지키고 선 것을 보면 얼마나 반가워하실까?


요즘은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감나무는 거의 관상용으로, 가을 속의 풍경으로, 고향의 향수를 감수하기에 크나큰 위안의 한 폭의 그림으로 나의 머릿속에 낙인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길가다 감나무를 보면 늘 감격이다. 감나무가 어머니의 또 다른 형태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남편이랑 여행을 갔다가 강 건너에 주렁주렁 가지에마다 감을 휘청휘청 달고 선 감나무를 보고 저도 모르게 감나무다 하고 소리 친척이 있어서 남편에게 무안할 정도로 피잔을 받은 적이 있다. 내 마음속의 감나무가 얼마나 신성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남편을 나무랄 수도 없었지만 저으기 서운했다. 그 기색에 얼굴에 고스란히 비춰서인지 감나무로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주면서 나를 위안해주던 기억의 한토막이 예쁘고 따스한 추억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살다 보면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들이 힘들게 할 때가 있다. 그때면 남 다 자는 밤중에 길목에 선 감나무를 찾아 줄기차게 달려가서는 한참씩 끌어안고 울어버리고 했다. 그 슬프고 힘든 시간들은 감나무의 거칠한 가죽 위에 끈적이는 눈물을 한 움큼 빼고 나면 후련해지는 그런 날들 되었고, 감나무에 기대어서 한없이 인생의 힘든 사연들을 푸념처럼 널어놓고 오면 가슴을 누르던 사연들은 벌써 바람 타고 멀리 사라지고 막혔던 가슴은 뻥 뚫린다.


이렇게 나는 해마다 감나무에 달린 감들에 내 슬픈 이야기들을 한 묶음씩 담아서 묶어놓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홍시 하나에 이야기 하나, 홍시 두 개에 이야기 두 개, 이렇게 슬픈 이야기는 가을바람의 풍요로운 입김을 받아서 더 붉은 감으로 익어가고 나도 더한층 익어가는 듯했다.


엄마, 나는 지금까지 엄마가 너무나도 쉽게 휘청거리는 내가 걱정되여서 저렇게 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지마다 초롱불을 켜켜이 켜놓고 나를 기다린다고~ 오는 길 잃을까 바~ 근데 나는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이곳을 찾아오곤 해요. 그냥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가을의 익어가는 감나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기대어서 내 마음을 풀 수 있는 감나무를 만날 수 있는 가을이 좋아서 그리고 다가오는 초겨울이면 하나둘씩 살아져 가는 홍시들을 보면서 사라져 가는 엄마의 온기를 못내 아쉬워하면서 늘 나에게 따뜻한 사연을 들려주는 감나무에 기대어 다음 해 가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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