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는 하얀 봄에, 20.

20. 책갈피는 하얀 봄에.

by 신지연

미희는 이른 오전 미용실에 들려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트위드 재질의 정장차림에 속이 비치지 않는 단정한 까만 스타킹. 그리고 굽이 높지 않은 단화를 신었다. 염색을 하고 화장을 하는 등 평소와 달리 멋을 부린 이유는 지우의 대학 졸업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극영화과에서 우등졸업한 아들은, 꽃다발을 들고 졸업식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부탁이 없었어도 자신은 당연히 찾아갔을 거였다. 미희는 안개꽃을 한 다발 사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 의자에 앉은 미희는 품에 안은 안개꽃 향기에 눈을 감았다.


꽃의 향기는 그대로인데,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 자신은 어느덧 다시 60대가 되었다. 그간 전생에서 해보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감사한 삶을 누려온 자신. 전생의 슬픔은 아련히 잊혀져, 온통 꿈 속의 일만 같았다. 미희는 기억 속의 사랑을 더듬었다.


나의 태수,

그이는 어디서 지내고 있을까.


생각말미 미희는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전생, 지우 아빠가 세상을 떠난 날짜가…. 미희는 손가락을 셈을 하며, 계산을 해 보았다. 바로 어제였잖아. 미희는 심장이 쿵쾅거려서 바르게 숨을 쉴 수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미희가 마음 결을 다듬으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미희는 전생의 기억이 또렷해져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발신자는 아들, 지우였다.


두 번, 세 번 진동이 울린 후에나 미희는 마지못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우야.”

“어머니. 어디세요?”

“지하철. 지금 네 학교에 가는 길인데….”


“아, 지하철이라면 통화하면 안되겠네요. 아니, 서연 원장님이랑 다른 후원자 분이랑 전부 오셨는데 어머니만 안 보여서, 어디까지 오셨나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 그래.”


“조심히 오세요,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요.”


미희는 끊긴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하철 창 밖에는 햇빛이 따사롭게 겨울을 예쁘게 조각내고 있었다. 찬란함을 향해 내달리는 열차 안에서, 미희는 두 손을 모았다. 태수씨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건, 부디 건강하기를. 기필코 행복하기를. 미희는 간절히 기도하며 안개꽃을 끌어안았다.


시간을 다시 한 번 더,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책갈피를 끼워뒀던 그 봄날을 다시 한 번 더 경험할 수 있다면.


미희는 남편의 손을 놓아버렸던 어제를 연거푸 후회했다. 설령 어제 날짜로 그의 수명이 다한다 하더라도, 단 하루를 산다쳐도 우리가 함께하는 삶이 더욱 기뻤으리라. 미희는 어떻게 살아도 결국 후회가 남는 인생, 마음이 가는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정답이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삼켰다.


남편과 다시금 삶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목적지인 역에 도착할 때까지 미희는 안개꽃을 연신 쓰다듬었다.


사람이 정말 구름떼처럼 많은데도, 지우는 멀리서 걸어오는 미희를 한 눈에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미희가 걷는 속도가 아쉬웠던지 지우는 빠르게 달려와서 미희를 덥썩 껴안았다. 밝고 건강한 목소리가 교정에 크게 울려퍼졌다.


“어머니!”


미희는 안개꽃을 지우에게 건내주며 미소지었다.


“졸업 축하해, 우리 아들. 그간 고생이 많았네.”


지우는 학사모를 미희의 머리에 얹어준 뒤,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틈으로 안내했다. 서연 원장님이 제일 먼저 미희에게 인사를 건냈다. 미희는 반가운 마음에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덕애원 퇴소 후에도 한결같이 아들의 마음을 지켜주신 감사한 분. 미희의 공손함에 원장님은 엷게 미소지으셨다. 그리고….


원장님 곁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성이 미희를 향해 웃고 있었다. 미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너무 놀라 머리에 쓰고 있던 학사모를 떨어뜨렸다. 반듯한 이마, 또렷한 눈썹, 약간 날선 눈매 그리고 총기어린 눈동자. 세계 각국을 돌며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태수씨!”


미희의 외침에 태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에, 좋은 구두를 신고 있는 그는, 머리도 정갈히 다듬어져 몹시 품위있어 보였다. 맵시있는 차림새와 전에는 보기 어렵던 깊이감 있는 여유로 태수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두 눈 가득한 맑은 빛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우가 대신 답했다.


“어머니께서도 후원자 님을 알고 계세요?”

“후원자라니….”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던, 다정한 아저씨요.”

“아아, 널 입양하고 싶어했다던.”


“네, 하지만 태수 아저씨도 결혼을 하지 않으셔서 절 입양하실 수 없었어요.”


미희는 떨리는 손을 꾹 부여잡았다.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태수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전생의 나는 아마 어제 죽었을거요.”


태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 오늘을 기다려 왔어.”


태수의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미희는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지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원장님은 지우의 손을 잡아, 녀석을 살짝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지우가 작게 물음표를 꺼내자 원장님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쉿, 하고 소리를 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 잠자코 뒤로 숨었다. 태수는 미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간 당신을 잊지 못했소. 한순간도 그대 없이 살지 못했어.”


미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태수는 빠르게 미희의 어깨를 잡아채, 그녀를 부축했다. 태수의 품에 안긴 미희는 태수의 옷깃을 세게 잡았다. 반갑고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쁘고도 속상한, 알 수 없는 마음, 감정의 해일이 미희의 영혼을 삽시간에 휘감았다. 미희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때리려다가 이내 손에 쥔 뭉툭한 감정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수십년이 넘도록 자신을 피해 숨어있었던 것인지, 기적같은 우연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 있어줘서, 다시 내 삶에 돌아와줘서…”


미희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태수는 미희의 젖은 뺨을 매만지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미희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옆에선 지우가 히익, 하고 놀라는 소릴 냈지만 미희는 울음섞인 입맞춤을 나누는데 집중했다. 겨울 햇살이 두 사람만 오롯이 남기고 모든 풍경을 지웠다. 미희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태수 역시 미희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봄의 초입에 성큼 닿을 만큼 오랫동안 숨결을 나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태수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열린 상자 안에는 예쁜 반지가 들어 있었다.


“나와 결혼해 주겠소?”


미희는 활짝 웃었다.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두 번의 삶을 살며 충분히 깨달았으니까. 미희의 웃음에 태수는 반지를 꺼내 미희의 손에 끼워주었다. 미희는 손가락에 맺힌 빛을 응시했다. 태수의 미소를 빼닮은, 그래. 마치 하늘의 햇님같은 찬란한.


“태수 아저씨와 어머니께서 결혼하는 거에요?”


지우의 놀란 목소리에, 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가족이 될꺼야.”


미희의 말에 지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태수는 지우의 등을 두드렸다. 미희는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계신 원장님께 되물었다.


“원장님께서는 언제부터 이 모든 걸 알고 계셨던 거에요?”

“새벽녘, 태수가 입술이 잔뜩 부은 채, 울며 찾아온 날이 있었어요. 그 날 동이 틀 무렵까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동안 태수의 존재를 숨겨서 미안했어요, 미희씨.”

“그런….”


미희는 태수의 손을 맞잡았다.


“지우가 우리의 아이인 건 어떻게 알았던 거에요?”

“오랜만에 덕애원을 찾았는데 나와 얼굴이 똑닮은 아이가 있어서 이상하게 눈길이 가더군. 곁에 두며 아껴주는데, 나중에 지우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확신을 갖게 되었지. 어쩌면, 어쩌면 하고….”


태수는 미희의 눈물을 닦아주며 마저 이어 말했다.


“다른 아이 한 명은 찾았소?”

“아뇨. 둘째는 여지껏 만나지 못했어요.”


“어딘가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거야. 외로워하지 않도록 빨리 찾아봅시다.”


지우는 두 사람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정을 알고 계신 원장님만 빙긋 웃으실 뿐. 원장님은 혼란스러워 하는 지우에게 다정히 말을 건내셨다.


“우리 지우.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참 행복했지.”


원장님은 지우 대신 꽃다발을 안고 계셨는데, 품에 안은 안개꽃을 닮은 하얀 향기가 말씀마다 맺혀 있었다. 축복인듯, 바람인듯, 알 수 없는 확언에는 온통 고운 꽃이 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행복해 질거야. 다가올 봄에는 책갈피를 꽂아두고 싶을 만큼.”



<책갈피는 하얀 봄에> 마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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