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건넨 수연은 탐탁지 않아하는 얼굴이었지만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애초 아주 이른 아침에 카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희는 얼마나 오랫동안 서서 기다렸던 것인지 손가락 끝이 차가운 공기에 곱아든 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얼결에 그 인사를 받아준 수연은 자꾸만 영주의 얼굴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릴 뻔했지만, 재희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종이조각을 건넬 뿐이었다.
그 종이조각을 펼쳐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고 이름도 알긴 했던 사이라 떨떠름한 낯을 대놓고 드러내기도 애매했고, 그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움직여 죄송합니다, 영주에게 전해주세요, 하고 돌아서 가버리는 등이 유난히 작아 보였기 때문이리라. 결국 영주가 출근할 때까지 카운터의 포스기 앞에 선 채 종이조각을 계속 매만져볼 뿐이었다. 작은 메모지에 무언가를 접어 반으로, 거기서 또 반으로 접은 작은 종이는 몇 번을 망설였는지 손때가 묻어 조금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결국 영주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영주야."
"네?"
"재희가 전해달라고 한 거야, 그거."
그렇지만 나는 네가 불편하면 그거 버렸으면 좋겠어. 수연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자그마한 숨소리 두 개가 음악을 틀지 않은 카페에서 맴돌았다. 영주는 그런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아, 재희의 지인에게서 이 카페를 소개받았었지, 하고 떠올렸다. 어쩌면 이제 그런 사실은 쓸모없을지도 몰랐지만 수연이 그렇게 거북해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반쯤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던 수연의 손에서 받아 든 종잇조각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영주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분명 이 종이를 펼쳐보면 숨이 가빠오고 눈물이 나겠지만,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겨우 벽에 기대어 무너져 앉고 말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지 않은가, 영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에 앞치마를 둘렀다.
의연해진 것은 아니다. 괜찮아진 것도 아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조차 할 수 없다. 몸과 마음에 지니고 다니던 인생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서 머릿속을 흔들어놓는데 괜찮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그런 척을 할 뿐이라 앞치마 주머니에 종잇조각을 넣는 영주의 손이 떨렸다. 수연은 애써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출입문의 팻말을 오픈으로 돌렸다.
*
영주는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낯선 카페에 발을 들였다. 고소한 커피 볶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뿐이었다. 마음을 휘젓고 다닌 것치고 종잇조각에 쓰인 것은 아주 싱겁고 단순하게 시간과 장소였다. 김이 샜다기보다는 그것밖에 적혀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글을 쓰는 데에 재주가 있었어도 서로의 마음을 울리는 데에는 젬병이었지만 분명히 재희가 써둔 조그만 글귀에도 눈물을 흘릴 만큼 의연하지 못한 마음이 무너져 내렸으리라, 영주는 생각했다.
재희와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오 분정도 더 지나서였다. 부러 쪽지에 적힌 시간보다 십여 분 일찍 도착했는데 일찍 카페에 들어선 것은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숨이 가빠오지는 않았다. 재희나 영주나 눈인사도 손인사도, 어색한 안녕 소리조차 하지 않고 마주 본 채 자리에 앉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앓을 만큼 놀랐더라, 왜 그렇게 힘들어했더라. 영주는 재희의 투명한 눈을 들여다보다가 익숙하지 않게 된 재희의 웃음을 가만히 마주했다. 어쩌면 그때는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에 선 채로 멀리서 보이는 재희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 찾아오지 않은 재희에게 멋대로 기대했다가 멋대로 실망해서였을지도 몰랐다.
"겁쟁이."
"응?"
"우리 말이야."
너나 나나 여전히 같아. 물론 어렸을 때와 조금 다른 점은, 우선 큰소리부터 치고 봤던 때보다 조금 더 참고 움츠리게 되었다는 것일 테다. 영주의 말에 소리 없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댄 재희가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물론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둥, 피곤하냐는 둥 그런 말을 할 만한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영주는 가만히 재희의 말을 기다렸다.
이별 후 전 연인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 건 꽤 거북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미련과 아픔을 너무 많이 남긴 채로 그걸 서로 챙겨 오지 않고 헤어져서 그럴지도 몰라, 영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 아래 놓인 손을 꼼지락거렸다. 제대로 끝내지 않은 이별이 기나긴 시간을 거쳐서 두 사람의 사이에 얄팍한 줄을 그어오고 있었다. 마침표를 찍지 않고, 펜촉을 종이에서 떼지 않은 채 여전히 그어오고 있었다.
매듭짓지 못한 사이임에도 거북하지 않은 사실은, 어쩌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오며 자리를 떠나서였을지도 모른다. 구질구질한 미련으로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아서일지도 모른다.
재희는 영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미안."
"뭐가?"
"그날 너 봤던 주제에 도망친 거."
그렇게 말꼬를 튼 재희가 천천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놀라게 했던 거. 많이 놀라면 열나고 몸살 날 거 알면서 사과도 안 했던 거. ……그 날 너 두고 그냥 가버린 거.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꼬투리 잡고 늘어졌던 거. 피곤하다는데 말 안 들어주고 잔소리만 했던 거. 세탁물 제 때 안 내놓는다고 화냈던 거. 반찬투정했던 거. 자꾸 툴툴거렸던 거, 전부.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며 영주를 바라보는 재희의 눈은 얕지도 깊지도 않았다. 영주는 그제야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이 깔끔하게 녹아내려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서로의 마음을 복잡하고 지저분하게 얽어두었던 명주실 같은 찌꺼끼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오로지 영주와 재희 두 개인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어딘가에 기대지도 않고, 서로를 밀어내면서 지탱하지도 않고서 서로를 마주할 수 있구나. 그만큼 시간이 지났구나, 그때에는 그냥 마지막으로 남은 응어리를 털어내느라 아팠을 뿐이고…… 영주가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속에 쌓였던 아프지 않은 이별의 종지부를 찍어내면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재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은 이제 미련도 어떤 것도 아니다.
너한테 했던 모든 것들, 전부 미안했어. 그렇게 말한 재희는 떠나겠다는 말과 함께 싱긋 웃어 보였다. 버릇처럼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서 영주의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재희는 영주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다가, 조금은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지다가 이제 곧 자신에게는 영주에게 무언가를 챙겨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서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습관이 무섭구나. 그렇지만 습관도 차차 흐려지기 마련이다. 흐려진 후에는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되새기게 될 뿐이다.
"멀리 가니?"
"정확하게 결정한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럴 거야."
"그렇구나."
잘 지내, 아프지 마, 그런 말을 하려다가 영주는 입을 다물고 재희와 똑같이 웃어 보였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영주는 영주의 삶을 살아갈 것이고, 재희는 재희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전에 그만두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될 영주는 다시 작가로서 발을 내딛을 재희에게 연락을 할 구실조차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길의 끝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은 어쩐지 조금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서로에게 누군가가 있겠거니, 적어도 자신 스스로를 아껴주겠거니, 하고 천천히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 흘러가는 바람으로, 깊고 깊게 새겨져 잠들 수 없는 밤에는 주섬주섬 꺼내볼 추억의 한 조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