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가 결심한 까닭은

미련과 후회, 20221023

by 윤재영

집이 금방 상자로 가득 찼다. 재희는 혼자 살았으면서 왜 이렇게 짐이 많았던 걸까, 하고 고민하다가 생각을 곧 지워버렸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 문단에서 고아가 된 신세에 회사에서는 하루에 한 번 꼭 미운 소리를 듣는 대리의 위치. 어딜 가나 마음 붙일 곳이 없었는데 집에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 많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는 무덤덤하게 생각하며 쓰레기봉투를 꽉 묶었다. 짐을 덜기 위해 열심히 집을 청소했음에도 커다란 쓰레기봉투 하나를 겨우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갑자기 집을 청소하는 건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재희는 언제나 늘, 항상 그렇게 해야 했음을 생각하다가 꾸역꾸역 미뤄왔던 그것을 이제야 실천하는 것뿐이었다. 혼자 살며 서늘하게만 느껴졌던 집안을 둘러본 재희는 그 집에서 꼭 자신 혼자만 살았던 게 아니었음을 굳이 무시하지 않고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장인이 집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퇴근한 뒤에 생기는 시간뿐이었으므로,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끼니를 때운 재희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이것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언젠가 그렇게 넓지는 않은 이 집이 커다란 영화관처럼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낮고 작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서 오래된 영화를 볼 때면 곁에 항상 싸구려 와인이나 몇 캔씩 묶어 만 원쯤 하는 맥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에는 뭘 하든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일을 끝내고 와 목이 아프다는 영주의 목에 따뜻한 수건을 둘러주고, 마사지해주겠다는 영주에게 손을 맡겼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면 지나가는 누군가는 분명히 웃을지도 몰랐다.


영주에게도 그렇게 느껴질까, 그 애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재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맥주 거품과 함께 손을 적시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집에서 지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재희는 식탁과 자신의 손을 느릿느릿 닦아내다가 방 여기저기에 난잡히 쌓인 상자를 모두 밀어내고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영화 블루레이도 이제 곧 전부 처분해야 할 터다. 너무 많이 본 탓에 손때가 묻고 코팅이 조금 벗겨진 것 같은 시디를 조심조심 플레이어에 밀어 넣고 온 집안의 불을 껐다. 이러면 눈이 나빠진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곁에 앉아 함께 영화를 봐주던 영주의 모습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 내일 출근해야 하지만 그런 것쯤은 이제 잊고 싶었다.


질리도록 자주 본 영화는 이제 대사를 외울 수 있을 정도다. 영화 장면 속 길을 걷는 여자가 어떤 말을 할지, 저 멀리서 지켜보는 여자가 어떤 얼굴을 할지도 전부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잊을 수 없는 추억에 잠겨 저 멀리로 추락할 것이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떠올라 눈앞의 모든 것을 잠식하게 될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게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된다는 사실은 씁쓸하기만 했다.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다.


*


아주 먼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고, 그게 이 나라가 될지 해외가 될지, 오랜 시간이 될지 짧은 시간이 될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 재희를 이서가 빤히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정돈한 덕에 그나마 좀 지나다닐 공간이 생긴 화방은 제법 깔끔한 것이 보기 좋았고, 이서는 재희가 사다 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할지, 그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에 재희는 문득 혼나는 기분이 들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깊은 눈을 한 이서가 학생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만큼 앳되게 생겼지만, 사실 재희보다 한 살밖에 어리지 않다는 사실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들어간 대학은 꽤 오랫동안 휴학하고 있다는 이서가 굳이 이 화방에서 일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이서에게서 재희는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는 점이 조금은 낯설게 다가왔다.


이서는 학교 책상처럼 낮은 카운터 앞에 앉아서, 재희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아주 드물게 먼지 냄새가 나지 않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따뜻한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재희는 문득 혀가 차갑고 딱딱하게 굳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도망치는 거네요."

"……."

"탓하려는 게 아니라요, 사람이 도망칠 수도 있는 거라고요."


이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도망을 치는 것이라고 담담히 결론짓는 이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재희는 커피가 담긴 컵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무지 마주할 수 없어 내내 도망치기만 했던 결론과 직면하게 되는 기분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아프고 부끄럽다. 도망치는 걸 탓하는 게 아니라는 말조차도 그런 자신을 어떻게든 위안하고자 하는 다정한 목소리인 것만 같아서.


"보통 도망치려는 건 매듭을 짓지 않고서 하는 거잖아요."

"응."

"근데 가끔은 도망치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있던데요."


아니면 엄청나게 후회하게 되더라고, 이서는 제 몫의 커피를 남김없이 마셨다. 세상의 산전수전 다 겪은 것만 같은 목소리와 말투에 재희는 바람 빠지도록 푸스스 웃어 보였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웃지 마세요. 날카롭게 톡 쏘아붙인 목소리 끝이 둥글둥글했다. 무심하고 다정한 성격이 돋보이는 목소리였다.


"해외로 나갈 수도 있는 거예요?"

"아마도. 해외로 나간다면 비자 때문에 짧겠지만."

"국내였으면 좋겠다."


왜? 컵 끝을 잘근잘근 씹던 이서가 재희의 의문에 눈을 밉지 않게 흘겼다. 그냥 아주 오래 안 보게. 탁 소리가 나도록 컵을 놓으며 기지개를 켜는 이서는 어쩐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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