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뒤 소란이 요란했다, 20221010
영주의 열이 가라앉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나서였다.
수연은 영주가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열이 가라앉다 못해 평소와 같이 멀끔한 얼굴을 한 것이 이전과 같아 더 쉬라는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그를 카운터에 세웠다. 영주는 조금 더 수척해졌고, 조금 더 말수가 없어졌다. 쉬어버린 목소리는 어떻게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수연이 아무리 따뜻한 물에 꿀과 레몬을 듬뿍 넣어서 깨끗하게 정돈된 창고에서 휴게 시간을 보내는 영주에게 건네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았다.
영주는 자신이 쉬는 동안 싹 정리해 두었다는 창고를 멀거니 둘러보았다. 분명 재료나 쓸모없는 짐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쌓여있던 창고가 정말 휴게실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아주 뛰어나게 넓어졌다거나 완전히 다른 방처럼 바뀐 것은 아니고, 구석에 짐과 재료를 분리해 담은 상자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영주는 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손장난만 치다가, 도무지 흐르지 않는 휴게 시간에 고개를 젖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열만 떨어졌을 뿐이지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해 몸에 힘이 없고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눌러오는 두통은 여전했다. 그렇다 해서 계속 일을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티 내지 않았지만, 이 상태로 일주일 동안 일을 하게 되면 분명히 다시 탈이 날 것 같았다. 일을 쉬는 날 병원에서 영양제 주사를 한 대 맞으면 괜찮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다.
문이 닫혀있는데도 달콤하고 구수한 커피 냄새가 솔솔 풍겼다. 일을 할 때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제야 조금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휴게실에는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간식 바구니가 놓여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쪽으로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영주는 문득 재희의 가족으로부터 보내왔던 음식 보따리를 떠올렸다. 재희가 영주의 집에서 머물던 조금 추운 날이었다. 하필 금요일 낮에 보일러가 고장이 난 바람에 수리를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던 날, 영주는 한창 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픈 날에는 항상 무엇이든 서럽기 마련이고, 하필이면 그런 날 집을 비운 재희가 조금 미웠다. 싫지는 않았다. 미움과 싫음은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이었고 다른 감정이었으니까.
'그런 날'이라, 영주는 세 글자로 이루어진 말에서 주의를 떼어내려 애쓰며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콘센트가 누워있는 자리와 멀리 있어서, 충전 중인 핸드폰에 무슨 알림이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면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말 한마디로 모든 게 가능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으슬으슬 추워지는 몸을 추슬러 조심스럽게 걷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우스운 것 같아 영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잘 나가는 학원에서 인지도가 제법 쌓여가는 강사로 일 하며 처음으로 낸 휴가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컨디션 관리도 능력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려가면서 조금은 자조했던가.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서러운 마음을 몇 년이 지난 영주 자신이 조금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스스로의 속삭임과 함께.
그리고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보고 영주가 급히 현관문을 열어젖혔을 때 쇼핑백에 가득 담긴 무언가와 마주했다. 손으로 만져보았을 때 아직 따끈했던 그것은 재희의 집에서 보내온 음식들이었다. 식지 않도록 급하게 운전해다 집 앞에 두고 또 미팅을 위해 훌쩍 가버린 재희의 등을 떠올리다가, 재희의 앞에 서서 '딸내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위한 음식'을 준비했을 그의 가족들을 떠올렸었다. 영주는 그 쇼핑백을 품에 꼭 안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의 나머지 하루는 어떠했더라. 지금 당장 아픔이 가시질 않는 영주는 그 이후를 잘 기억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 직접 들르지도 못할 만큼 바빴지만 그럼에도 문 앞에 음식을 두고 갔던 재희의 상냥함이나, 친구가 아프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음식을 해다 전해주라고 떠밀었을 그의 가족의 다정함이 지금은 아프다. 그런 사이인 줄 알았으면 내 손목 아파가며 음식 할 일 없었을 것이라 매섭게 쏘아붙이던 목소리가 금방 뒤따르기 때문임이라.
"영주야."
"네."
"잤어? 깨웠으면 미안해."
"아니에요, 안 잤어요. 괜찮아요."
갑자기 우유가 부족해 사러 다녀와야겠으니 잠시 카운터를 좀 봐줄 수 있냐는 물음에 영주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쉰 시간만큼 일찍 퇴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은 그저 웃어넘기고, 걱정되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에게 영주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다가 곧장 주문을 받았다. 그거 조금 쉬었다고, 그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고 움직임에 힘이 실린 것을 잠시 바라보던 수연이 카페를 나섰다.
커피 원두가 갈리는 소리와 머신을 통해 진한 에스프레소로 추출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잔잔함을 가르는 그 시끄러운 소리가 싫지 않았다.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아예 없앨 수는 없어도, 조금쯤은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를 떠올리고 되새길수록 마음에 자리 잡은 상처는 그만큼 진해진다. 깊어지고 커진다. 그러나 그만큼 단단해질 수 있다. 영주는 재희가 곁에 없는 몇 년간 그렇게 살아왔다. 속이 시끄러운 건 곁에 도착하지 않은 재희에게서 듣고 싶은 말의 외침이고, 머릿속을 울리는 건 재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자신에게 돌려서 하는 자책이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음료 서너 잔을 만들어내고 사람이 사라진 카운터는 다시 적막에 잠긴다. 스피커에서는 유행이 지난 재즈풍 음악이 잔잔히 들려오고 있었다.
영주는 버릇이 된 것처럼 조그만 창 너머 골목과 대로변을 내다보았다. 평일 이른 오후의 길목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이제 다섯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쯤이 되면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재희는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의 그 사이에 섞이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을 수도 있고, 아예 그 사이에 이미 섞여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 이곳에는 오지 않겠지. 재희는 그런 애였으므로, 영주는 재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주 많은 머릿속을 완전히 깜깜하게 칠해버렸다. 찾아올 거면 뭐라도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날처럼 싸우지는 말자고 다짐했던 것도. 영주와 재희는 그간 늘, 너무도 소란스러웠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