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는 미련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게 흔한 미련인 줄도 모르고, 20221009

by 윤재영

재희 씨 대체 뭐 하자고 이런 보고서를 올린 거야! 귀가 아릴 정도로 불호령이 사무실 전체를 울리자 일대가 싸늘하게 조용해졌다. 굳이 바로 옆으로 불러서 소리를 지르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음에도, 재희는 멍하니 곽 차장이 가리키는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하다고 기어가는 목소리는 모기처럼 작았지만 반성의 기미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몇 번 둘러본 곽 차장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대충 손을 저어 돌아가기나 하라고 짜증을 냈다.


재희는 멍한 낯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았지만, 반려된 보고서가 화면에서 수정사항이 필요하다고 메모까지 달린 채 깜빡이는 것을 클릭할 정신이 없었다. 분명 이것을 먼저 끝내야 퇴근시간을 두 시간 넘겨 사무실을 겨우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일이 밀려들고 있음에도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그저께의 실수까지 합해 부장이 면담을 하자고 자리를 만들어 부를 수 있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사무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일 하는 게 아니라 메신저에서 대화 나누는 키보드 자판 소리가 떠들썩했다. 겨우 차장과 부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를 하러 떠나고 나서야 다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이 늘어졌다. 그때까지도 재희는 자리에 앉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자리에 커피가 한 잔 놓이자 그제야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그래 봐야 탕비실에 자리 잡은 낡은 커피머신으로 내린 캡슐 커피일 뿐이지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런 실수 잘 안 하시잖아요."


핸드폰에 도착했던 메시지와 비슷한 물음이었다.


그런 실수를 잘 안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재희는 수많은 실수를 회사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저질러 왔고 어떻게든 수습해왔는데 남들의 눈에 비친 재희는 어느새 실수를 잘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희는 대답 없이 그냥 조금 웃어 보이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할 것임을 짐작한 사람들이 재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서 숨 돌리느라 조금 소란스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재희는 홀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영주의 앞에서 재희는 늘 실수만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과 정 반대인 것이다. 스스로 정한 것이든, 출판사에서 정해준 기한이든 툭하면 날짜를 까먹어 허겁지겁 파일을 켜던 모습을 지켜봐 왔던 영주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결국 시간을 많이 남기고 파일을 보낼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수강생들 앞에서 무언가를 가르치고 책임감 있게 약속시간을 맞추어야 했던 영주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을지도 몰랐다.


물론 영주는 그러게 제 때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가벼운 타박뿐이었지만, 곽 차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답답한 모습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조금씩 좀먹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가벼운 실수를 할 때에는 이런 생각 따위 곱씹어본 적이 없는데, 그 조그마한 인영을 영주라고 확신한 순간부터 이 모양이었다. 핸드폰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가고, 재희는 조금씩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주임님, 저희 커피 마시러 가요."


하루 종일 멍한 모습을 보다 보니 걱정되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 신규 사원에게 괜찮다고 웃어 보이며 카드를 내밀었다. 재희의 손에 들린 카드에 반쯤 사색이 되어서는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사원에게 억지로 쥐여 주고는 아래층 카페로 내려보냈다. 그래 봐야 눈치를 보느라 싸구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 마실 게 분명했지만 딱딱한 사무실에서 숨통 좀 트고 싶었을 것이다.


퇴근시간은 다가오고, 일은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희는 야근을 하는 사람들이 몇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오늘은 내가 문을 닫고 가겠구나, 짐작했다. 고개를 콕 숙이고 모니터에 시선을 박은 채 수정 사항을 반영한 보고서를 한 자 한 자 작성하기 시작했다. 집중은 되지 않지만, 나중에 아무도 남지 않은 사무실에서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문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은 평범하게 집으로 돌아가 와인을 마시면서, 영화나 한 편 보고 일찍 잠드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다른 때의 생일처럼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하루하루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건 말이 안 된다. 왜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한 순간의 충동이 모든 것을 전부 망쳐가고 있었다.


그 작은 창 너머의 얼굴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재희는 그 동네에 들어서는 직후부터 매 순간 죄인이었는데, 그 동네에서 쭉 살아오면서 재희의 가족을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도 하건만 그저 평온하고 멍해 보였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그러했듯이.


영주는…… 공든 탑을 무너뜨리듯이 쭉 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무얼 하고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면 안 되는 일인데 문득 그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자꾸만 상념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을 재희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화면 속 보고서에 무수히 많은 점이 생겨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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