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 00 선생에게 쓴 편지 글
嚴.. 선생에게
내일 8월 28일 오후 2시 태백예총회관에 강원대학교 소설가 전상국 교수님이 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 25명을 데리고 태백에 내려오신다고 하였다. 사실 이 글은 이홍섭의 시집 <숨결>을 읽고 편지의 형식으로 독후감을 써서 너의 홈페이지에 올리려고 쓰기 시작하였는데 쓰다 보니까 이렇게 확장되어서 마치 시집의 발문 정도의 분량의 글이 되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너는 얼마 전에 읽었지만 나의 시도 한 두 편 자연스럽게 끼워 넣는 이상한(?) 글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어차피 잘된 일이다. 이 글을 팔팔한 문학도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고 그냥 천천히 읽을 것이다. 글줄이나 쓴다는 시인들은 대체로 말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 또한 그쪽이니 문학을 전공하는 팔팔한 청춘들과의 대화의 장소에서 허튼 말실수나 펑펑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니까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김 00 시인이 강릉대학원 수업 중에 만난 이홍섭, 친필 사인이 되어 있는 이홍섭 시인의 <숨결><현대문학 북스刊>이라는 시집을 읽었다. 거의 두 달만에 나에게 전해진 조금은 식은, 그렇지만 따스한 시인의 숨결이 아직까지 느껴지는 그런 시집이었다. 두 달 동안 정 00 시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이 시집을 받는 순간 시집의 내용이 태백의 아류로 변해 있는 것은 아닐까, 태백시인(나도 태백 시인이니까)의 좀처럼 뚫릴 것 같이 않는 꽉 막힌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야릇한 감정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시집을 받아 들면 일차적으로 코끝을 스치는 감흥 같은 것, 아니면 희망 같은 것, 또 그게 아니면 첫 장을 넘길 때의 두근거림 같은 것, 이런 것들로 인해 나는 시집을 펼치면서 사치로운 사람이 곧잘 되기도 하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점에서 책 구경으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화로운 시간이었다. 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큼의 사치가 어디 있을까? 요즘엔 사고 싶은 책을 사면 서둘러 나온다. 각박해지고 시류에 쉽게 휘말리는 나의 심성 때문일 것이다. 좋은 책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한 희열이라든가, 첫 장을 넘길 때의 설렘 같은 것이 줄었다. 그래서 서글프다.
1998년 그의 첫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이라는 시집을 읽었을 때에는 강원도에 이런 시인도 있었나 했었는데 제2시집 <숨결>을 읽고는 드디어 그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여러 편의 시중에서도 네가 대학원 다니면서 연구하겠다고 했던 이성선 시인에 관한 시를 반복해서 읽고는 너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다. 몇 해 전에는 눈이 몹시도 많이 내린 겨울 태백산, 그래서 태백산의 유명세를 거침없이 뽐내던 태백산 정상으로 이성선, 최명길 시인과 태백 문단의 몇몇 시인들과 같이 오르던 그 아련한 등정이 지금도 새롭게 기억되는데 태백산 정상 근처에는 지금도 굳건한 직립의 고통으로, 고독한 연민으로 서 있을 주목의 기억이 나를 호되게 후려치는 것이다.
이홍섭의 첫 시집에서 그는
"철새를/지상에서 밀어 올리는 힘은/팔 할이 연민" (철새는 날아간다)이라고 고백 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외로운 날개 밑에는 /얼마나 많은 연민이 숨어 있는가" 묻고 있다.
연민, 연민, 연민!...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며 무서운 패러독스인가.....
이홍섭류의 연민을 본다, 그리고 연민으로 그리워지는 이성선을 눈물로 본다.
흰 장갑
-故 李聖善 시인
서울에서도
제일 번화한 대치동 사거리였다
잠깐만 보고 가려고....
설악산에서
막 올라온 선생은
마치 주례라도 보고 오신 듯
하얀 장갑을
끼고 나타나셨다.
그로부터 보름 뒤
선생은
또 홀연히 사라지는 주례처럼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었는데
나에게 차마 궁금했던 것은
그 하얀 장갑을
어디다 두고 가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게 하 궁금해 못 견딜 때는
지나가는 구름이거나
길가의 눈 덮인 돌멩이 거나
아니면
다 떨어진 러닝셔츠라도 붙잡고
이성 선표 흰 장갑이라
꾸역꾸역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어떤 문학잡지에서 이홍섭의 시를 읽고는 생의 바닥을 치는 시라고 생각했는데,
마라도
막배는 떠나고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태어나 처음으로
빗물에 삶은 라면을 먹으니
지나간 날들이
다 백척간두와 같다
한 발을 더 내디디면 바다였을,
이곳에서는 스님도
고기를 잡고
전복을 딴다, 머리를 깎아본들
이 망망대해에서
무엇을 구할 수 있으랴
이곳에서 모든 배는 막배다
다시 막배가 온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빗물에 삶은 라면을 꾸역꾸역 넘기며
무심히 바라보는 바다
막배 한 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라도를 떠나고 있다.
그의 시 <모래무지>에서 "좋은 시는/바닥을 치는 시야, 그지?"라고 그가 후배에게 던졌던 말처럼, 생의 바닥을 치는 시란 지린내 나는 일상의 낯익음과 어떻게 싸우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수없이 해보는 주문이지만, 시가 더욱 더러워지고 잡스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가 말하는 좋은 시에도 근접할 수 있은 게 아닐까 싶다. <나희덕의 발문 중에서>
그의 첫 시집에서 연민의 징후로 쓰인 시 <철새는 날아간다>가 그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제2시집 <숨결>에서도 연민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아가는 철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가의 가르침은 이런 인간적인 연민에 대해 경계한다. <붓다>는 일찍이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연민을 부드러운 족쇄라 부르고 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조그만 거미가 거미집에 매달려 있는 형상에 비유했다. 그리고 道(聖)를 위해서는 그 연민까지도 잘라버리라고 말했다. 이홍섭은 팔 할이 연민인 그의 시적 심성으로 보면 연민으로 인한 갈등과 번민은 가히 미루어 짐작이 될 만하다.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 풀도 김수영의 말처럼 바람 따라 눕고 산새들도 나무에서 잠이 든다. 우리들도 기여코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는데, 망망대해로 돌아가야 하는 괭이갈매기 이야기에 괜히 콧등이 찡해 오는 것이었다.
경포호수
철새들이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며
엔진도 고치고
요란하게 날개도 퍼덕여보는 동안
돌아갈 곳이라야
망망대해뿐인 괭이갈매기는
어쩌다
철새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냥 흰 가슴에
제 얼굴을 푹 파묻고는
괜스레 두 발로
브레이크를 꾹
밟아보는 것이다.
이홍섭 시인은 지금 비승비속의 언덕, 세간의 방에서 살고 있다. 그는 불가와의 각별한 인연들이 <숨결>이라는 제2시집의 골격이 되었는데 연민으로 바라보는 따스한 속가와 빗물로 빈 항아리를 채우는 승가에서 근원의 허기와 갈증으로 몸 뒤트는 이홍섭은 非僧非俗의 경계에서 계속 영혼을 따스하게 데우며 스스로 위안받고 있는 것이다.
밤비
남들 회사 갈 때
나 절에 간다
내 거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언덕 한편
나의 본업은
밤새워 내리는 밤비를
요사채 뒤뜰 항아리에 가득 담는 일
하지만
내리는 밤비는
항아리를 채우지 못하니
나의 부업은
나머지 빈 곳을 채우는 일
나는
항아리를 껴안고
비 내리는 꿈속을 헤맨다.
이홍섭의 몸과 영혼은 僧(聖)도 아니고 俗도 아닌, 바로 그 경계 언덕쯤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僧(聖)과 俗의 경계...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 라며 꽃이 만들어 낸 경계조차 괴로워했는데.. 나는 지금 어느 경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속에 발을 담그고 몸집이나 따끈하게 데우는 나는 僧(聖)의 근처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그림자
내가 죽으면
그림자는 어디로 가나
기린처럼
목이 길었던
내 그림자
한 번도 내 앞에 서지 못했으되
언제나
나보다 먼 곳을 바라보던
渴愛의 눈동자
어둠 속에서
함께 울던 그 많은 날들을 두고
내가 죽으면
그림자는 어디로 가나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
나 없는 곳으로 가나.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가 나 없는 곳이 바로 僧과 俗의 경계란 말인가. 聖에 도달하려는 의도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며 지난한 자기와의 투쟁일 테니까....
승 속에 사시는 스님의 마음을 흉내 낸 나의 졸 시
메뚜기 한 마리
어른 키 두 배나 되는 높은 옹벽에서 떨어진
메뚜기 한 마리 콘크리트 마당을 뛰네
사실, 너무 작지만 튀는 놈은 항상 보이네
자세히 보니 다리가 하나, 뛸수록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을 그리고 날개도 없는 햇메뚜기네
다리 하나로는 밤을 새워 뛰어도 옹벽 너머
푸른 숲으로는 영영 못 오를 놈
저 숲 속에 이런 메뚜기를 잡아먹는 개구리,
도마뱀 같은 천적들이 득실거려도
나는 이 풀향기를 가만히 들어
옹벽 너머 풀 속으로 던져 넣었네
오랜 비 그친 보도블록에 길 잃은 지렁이를
잔디공원으로 살며시 돌려보내는 어떤 노스님을
가만가만 따라 해보는 것 일뿐.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가 나 없는 곳이 바로 僧과 俗의 경계란 말인가. 聖에 도달하려는 의도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며 지난한 자기와의 투쟁일 테니까....
이홍섭은 성과 속의 경계를 흔쾌한 마음으로 헤매고 다니는데 애초부터 그는 성과 속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완곡한 고독과 끝이 없는 갈등을 <밤길>이라는 시에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밤길
손전등도 없이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데
노스님은 자꾸만 문둥이 얘기만 하신다
갈수록 길은 더 어두워지고
물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데
노스님은 어둠 속으로 손을 쑥 내밀며
손발 없는 문둥이가 되고 싶다 하신다
얼굴 없는 문둥이가 되고 싶어 하신다
일평생 운수납자로 살아오신 노스님
이 아득한 밤길을 잘도 오르시건만
어쩌자고 문둥이가 되고 싶으신 걸까
다시 내려가야 할 밤길을 걱정하며
열심히 길을 더듬는 서른 중반의 청맹과니와
어둠 속으로 열심히 팔뚝 질을 해대는 노스님
오늘따라 밤하늘의 별들은 너무 멀리 있고
컴컴한 산길은 멀기만 한 것이다.
이홍섭 시인 특유의 잔잔하고 나지막한 <숨결>, 이 가느다란 숨결 같은 시들이 더욱 빛난다. 그것은 이홍섭은 "내 거처는 非僧非俗의 언덕 한편"이라고 말한 확언의 시구에서처럼 그의 몸과 영혼은 聖도 아니고 俗도 아닌, 바로 그 경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며 비승비속의 경계에서 다량의 시들이 쏟아 내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非僧非俗의 중간 언덕쯤, 아니면 승가의 요사채 뒤뜰 때쯤, 아니면 사천왕사의 통로 그 정도쯤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할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그 실행(聖을 위한 오체투지라고 해야겠다.)을 위해 오체투지 하듯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없으니 뜨거운 문학적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이홍섭의 <숨결>이라는 한 권의 시집, 아니 시집 이상의 깨우침, 聖과 俗의 경계가 어디쯤 일까 하고 자꾸 되물어 보는 것이다.
나는 때론 아픈 도사리였으니까. 뼈아픈 심사와 행색으로 쓴 나의 졸 시 한 편을 감상하라. 그럼 이만 줄이겠다.
도사리라는 우리말이 있다.
*도사리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도사리라고 한다
나도 때론 아픈 도사리였다
*닭의 새끼는 병아리 개구리 새끼는 올챙이
*호랑이 새끼는 개호주 공의 새끼는 능소니
*꿩의 새끼는 꺼벙이 개의 새끼는 강아지
*소의 뱃속에 든 새끼는 송치 소의 새끼는 송아지
말의 아름다운 새끼는 詩詩恨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조기 새끼는 꽝다리 잉어 새끼는 발강이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농어 새끼는 껄떼기 열목이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섬뜩한 풀치
칼이 낳은 새끼가 풀이되고 풀이 자라 칼이 된다
풀치는 희망의 바다를 마시고 통통하게 자랐으면
갈치는 바다의 비애를 시퍼렇게 베고
근원도 없는 나의 쓸쓸함을 싹둑 베었으면 좋겠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장승욱 지음(하늘연못 간행)